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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타일랜드 여행

태국 깐짜나부리 여행, 콰이강 다리의 아이러니



많은 사람들에게 깐짜나부리는 <콰이강의 다리>가 있는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콰이강의 다리>는 동명의 영화제목 때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다리를 보며 사람들은 영화 속 스토리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근데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지금 깐짜나부리를 찾는 사람 중 195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치 우리가 고전 소설이나 영화를 본 적이 없는데 대충 줄거리는 알고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여전이 깐짜나부리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콰이강의 다리>이지만 지금은 단순히 이 다리를 보기 위해 찾는 곳은 아니다. 콰이강 다리와 함께 2차 대전을 떠올리게 하는 유엔군 묘지와 전쟁 박물관 이외에도 에라완 폭포, 호랑이와 코끼리 투어, 한적한 강가에 늘어선 게스트하우스들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깐짜나부리를 찾게한다. 게다가 방콕에서 2시간남짓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도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카오산로드를 나와서 511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부터미널로 갔다. 종점이어서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다. 터미널은 굉장히 크다. 티켓을 파는 부스도 엄청나게 많다. 맛있는 거 파는 식당도 즐비하다. 괜히 밥을 먹고 왔나보다. 깐짜나부리로 가는 버스티켓(99밧)을 사고 1층으로 내려가 버스를 탔다.


  


깐짜나부리 버스터미널에 내리면 툭툭기사 및 작은 봉고기사들이 몰려든다. 마치 이곳이 익숙한 듯 버스터미널을 빠져나와 콰이강의 다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터미널에서 볼 때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숙소와 강변, 유엔군 묘지등이 있다. 하지만 사실 걸을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터미널에서 콰이강의 다리는 1시간이상 걸어야할 듯 싶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다리도 걸어가기 멀고 터미널도 걸어가기 먼 애매한 거리다. 체크인을 하고 나와서 콰이강의 다리로 향했다. 자전가라도 빌릴까 싶었지만 이지 오후인 걸. 빌리는 게 아깝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자전거 대여를 하고 있지 않아서 대여하는 곳을 찾는 것도 일이구.



왠 뜬금없는 중국식 사원인가하겠지만 콰이강 다리 건너에 꽤 크게 자리하고 있다.


콰이강의 다리는 2차 대전에 세워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영국에 의해서 철거되었다. 그 후 다리 건설되었다. 일본군이 물자보급을 위해서 연합군 포로들을 이용해서 지었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혹독했다고 한다. 이 다리를 하나 놓는데 무려 12만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조선을 식민지화 했던 일본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수천의 조선 젊은이들을 착출해서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는데 이용했다고 한다. 일본군과 연합군 사이에서 압박을 받고 전쟁 후에도 아무곳에서도 받아주지도 돌봐주지도 않아 그들은 버림받았다. 강제 동원되었지만 일본의 패전후에는 전범이 되었던 조선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콰이강의 다리에 몇 년전 야간 조명이 설치되었다. 그 조명을 설치하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한다. 



 


여전히 이 다리로 기차가 다닌다. 굉장히 천천히 달리기 때문에 다리 위에서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피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다리 끝까지 달려가 피할 필요도 없다. 다리 중간중간에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콰이강 다리는 밤이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주변에 노점상들이 들어서고 고급 레스토랑들로 한껏 불을 밝히고 술과 음식을 판다. 나는 가난한 배낭여행자이므로 거리에서 꼬치 하나와 캔맥주 하나를 사서 강가에 앉아 다리가 파랗게 빨갛게 변해가는 것을 보며 앉아있었다. 12만의 젊은이들이 죽어간 곳인데 이제 그 사실 때문에 활기 띄는 곳이 되었다. 60년전 수만의 젊은이들이 정글 한가운데로 끌려왔는데 이제는 수만의 사람들이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서 이곳을 찾는다.  




멍 때리고 앉아 있으려니 모기가... -_- 이제 다시 어두컴컴한 골목을 30분쯤 걸어 숙소로 돌아간다.


  

  

2011년 7월 7일 낮과 7월 8일 밤

 깐짜나부리 전쟁묘지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방콕과 미얀마를 잇는 철도를 건설했다. 그 과정에서 강제징집된 아시아 각국의 10만명과 연합군 포로 2만명이 숨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철도는 죽음의 철도라 불리게 된다. 깐짜나부리 전쟁 묘지에는 당시 숨진 연합군이 묻혀있는 곳으로 국적이 네덜란드, 호주, 영국 등이다. 일렬로 줄지어 늘어선 비석 사이로는 잘 가꾸어진 잔디와 나무가 자라고 있다. 60년전 젊은이들은 이 뜨거운 열기 아래에서 죽어갔지만 지금은 스프링쿨러가 이 묘지의 식물들을 생기있게 만들어준다. 당시 연합군의 다섯배나 많은 아시아인들이 징집되어 이곳에서 죽어갔다. 그들을 위한 묘지는 없는 걸까? 일본의 점령을 받았던 많은 국가들에게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 일본은 마치 금방이라도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듯 우경화되어가고 있다.  



 


이곳을 채우고 있는 약 칠천개의 묘지의 주인이 군인이기에 그들의 소속 부대 마크가 새겨져 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곳은 여행지이지만 이곳에 가족이 묻힌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겠지. 

스물 여섯 나이의 아들, 형제를 떠나보내야했던 이들은 50년이 지나도 그를 잊지 못하고 이곳을 찾았다.

해리의 가족이 이곳을 찾은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네.



하나의 무덤을 온전히 가지지 못한 수 많은 사람들과 이름조차도 남기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묘지를 나와 길을 건너기 위해서 횡단보도 앞에 섰다. 버스 한대가 섰다. 창 밖을 바라보던 소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안녕, 소년.



또 하루가 간다. 깐짜나부리에는 거의 일주일을 머문 것 같다. 3일 정도를 머물다 쌍클라부리에 갔다 다시 돌아와서 삼사일 머물렀다.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에서 꽤 높은 가격의 세련된 숙소까지 모두 있고 끼니도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다. 와이파이 속도도 빠르다. 할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유유자적하기에 좋은 것 같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지나는 동안 한 도시에 오래 머물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은 쉬어가고자 일주일을 머물렀다.



복층의 오두막이 350바트밖에 하지 않았다. 물론 들어가보면 시설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나름 강가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 앞 풍경


  


쌍클라부리를 다녀와서 잡은 곳은 T&T 게스트하우스다. 깐짜나부리에서 내가 본 숙소 중에는 가장 싸다. 그리고 방에서 정말 빠른 와이파이가 잡힌다. 그래서 그 동안 밀려 두었던 포스팅을 많이 했던 곳이다. 아래 사진이 내가 묵은 150밧 짜리 싱글룸. 화장실은 밖에 있는데 5미터 거리로 깨끗해서 불편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태국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매끼니 맛있게 먹었다. 코코넛 밀크로 만든 똠냥 까이 빼고는 전부 입맛에 잘 맞는다. 오른쪽 상단의 고기는 정말 강추! 우리나라에서 먹었던 정말 맛있는 훈제삼겹살과 맛이 똑같다. 중국 패키지여행 가면 이 모든 것이 한끼에 올라오지만 이건사진 한장에 한끼다. 플레인 라이스를 10밧이 따로 주문해서 먹는다. 한끼에 30~50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