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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사이를 지나

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계급이 그 시대를 대표한다. 비록 역사는 단 한명 뿐인 왕과 소수의 권력층의 삶을 기록하는데 집중되어있지만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시대의 일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 동안 조선은 평민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선은 노비의 비율이 30%가 넘기도한 노비가 생산의 주체가 되는 나라였다고 한다. 내게 노비는 서양의 노예와 그리 큰 차이를 가지고 다가오지 않는다.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계층말이다. 삶이 '고통'일 수 밖에 없지만 태어나는 순간 정해져 그것이 차별인지, 분노할 일인지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말이다. 물론 조선 중기를 넘어가면서 신분제가 와해되기 시작하고 신분제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드러난다. 


 조선 정부는 노비의 수를 조절하기 위해서 때때로 정책을 달리하며 노비의 신분을 풀어주고 다시 노비로 만들고는 하였다. 조선의 인구를 1500년대를 기준으로 1000만으로만 생각해도 300만이나 되는 노비가 존재한 것이다. 그들이 모두 같은 삶을 살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책은 그 부분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상업활동으로 성공해서 엄청난 거상이 된 노비, 수 많은 제자를 거느린 글을 읽는 노비, 조선의 정치 실무를 장악하고 있는 수 많은 노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 서민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이런 성공을 거둔 노비는 소수임이 분명하다. 다만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노비의 수는 상당했던 것 같다. 조선이 농업국가이고 생산주체로서 노비가 꼭 필요했기에 다수는 농업에 종사하였을 것이다. 노비는 솔거노비, 외거노비, 공노비, 사노비로만 구분되는 줄 알았는데 매달 세금만 내면 되는 노비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들은 세금만 내면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글공부를 하거나 상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일반적으로 그 세금이 엄청났기 때문에 하루종일 일해도 그걸 채워넣기가 쉽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무래도 조선의 실무자로서 노비들이다. 지방 관아의 이방이나 중앙정부의 각 부처 실무를 노비들이 상당부분 당담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과거 시험을 통해서 많은 양반과 일부 서민들이 공무원이 되는데 그들은 실무와는 무관한 경우가 다수였다고 한다. 실무는 전혀 모르고 그냥 관리직 정도가 된 것이다. 실무는 평생(!)을 그 조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일해야 하는 공노비가 당담했던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와해된 조선사회에서도 신분제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과거만큼 튼튼하지 못했다. 평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배신감은 엄청날 것이다. 노비들은 그렇게 와해된 조선사회에서 줄어들어갔다. 문제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평생을 힘든 노역과 맞아죽어도 말 할 수 없는 신분이었지만 '일'이 있었기에 굶어죽을 가능성은 적었던 것이다. 근데 이제 스스로 살아가야하기에 땅도 뭣도 없는 그들은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노비는 임금 노동자가 되어갔다. 주인들의 입장에서도 점점 커지는 노비들의 의식수준에 두려움을 느끼고 임금노동자의 편리함을 깨닫고 있었다. 쉽게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노비들>에서 '임금 노동자'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느껴지는 쓸쓸함은 꽤 컸다. 지금 노비는 존재하지 않기에 사실 이건 '이야기'일 뿐이지만 임금노동자는 지금 지구인의 다수이기에 그 무게감과 현실감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여간 노비는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법적으로 이제 과거 노비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은 없다. 근데 현실적으로 과거 노비와 같은 입장에 있는 '임금 노동자'는 꽤 될 것이다. 그건 '갑'과 '을'의 관계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계속 되어왔기에 변할 수 없는 걸까? 뭐... 그 따위 '임금 노동자'도 되지 못한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


 <조선 노비들>은 꽤 흥미롭다. 국사책에서는 단 한명 밖에 없는 왕들의 이야기를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 이야기보다 많이 다루기 때문에 알 수 없었던 노비의 이야기들을 하기 때문에 새롭고 놀라운 것으로 다가온다. 문득 왕의 역사, 지금 대통령의 하루하루도 모두 기록되어지는데 보통 사람의 하루는 자신이 기록하지 않으면 기록되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500년쯤 후에 지금 써놓은 일기가 '대한민국 임금노동자의 일상'이라는 책에 실릴 지도 모를 일이다. 25세기 사람들에게는 21세기 한국이 자신들보다는 18세기 조선과 가깝기에 '노비'와 '임금 노동자'의 차이와 공통점을 어떻게 적을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