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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아산 여행]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만날 수 있는 현충사


현충사를 현충원과 비슷한 곳으로 알고 찾아보니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사당과 기념관이 있는 곳이었다. 현충사는 1966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긴 했지만 그 시작은 1706년때다. 이 지역 유생들의 주청에 숙종이 '현충사'라는 이름을 지어 액자를 하사하며 사당을 만들도록 했다. 역사 속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생기기도 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현충사의 규모는 굉장하다. 마치 중국 여행 중 마주쳤던 거대한 관광지들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넓은 길과 드문 드문 있는 건물들. 그래서 산책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무료다. 그래서인지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이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현충사를 둘러보는데는 1~2시간 정도 소요된다. 천천히 걷고 여유를 부린다면 2시간일테고 본전과 충무공이순신기념관 등과 같이 주요 건물만 본다면 1시간에도 볼 수 있다. 예쁜 길과 나무들이 많기에 의외로 데이트하기에도 나쁘지 않아보인다. 겨울이 시작되는 12월초에 다녀온 것이지만 아직 늦가을의 정취가 남아있었다. 눈내린 겨울에도 멋진 풍경을 가지고 있고 매년 4월 28일인 이순신 장군 탄신일에는 기념다례행제도 열린다고 하니 일년 중 언제가도 좋을 곳이다.



현충사 입구로 들어가 왼쪽에 보면 인포메이션이 있다. 그곳에 지도와 주요 유물에 대한 해설이 적힌 팜플렛이 있다. 마침 안개인지 중국에서 날아온 미세먼지인지가 뿌옇게 현충사를 뒤덮은 날이어서 묘한 분위기가 현출되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인데 입구쪽에 중국인 단체 여행자들이 많이 있어서 나오는 길에 보기로 하고 위로 올라갔다. 충무문이 보인다. 그 옆으로 분홍색 글씨가 인상적인 타루비가 있다. 타루비는 보물 1288호로 이순신 장군의 사망 6년 뒤인 그를 추모하기 위해 1603년 그의 부하 군사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가 살아있을 때나 막 죽었을 때가 아니라 6년 뒤에 만들어진 것이 더 의미있는 것 같다. 그의 사망 6년 후에도 그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던 그의 동료들이 그를 그리워했다는 것이 이순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말해준다. 근데 이 타루비는 복제품이라는 것이 함정. 실제 타루비는 여수에 있다.  



 아산 현충사 여행 정보


http://hcs.cha.go.kr/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길 126

전화 : 041-539-4600


하절기(3월 ~ 10월) :  9시 - 18시

동절기(11월 ~ 2월) :  9시 - 17시

휴관일                   :  매주 화요일

관람요금                :  무료

주차요금                :  연중무료 개방


 대중교통 이용법

온양온천역에서 1번출구로 나와 온양전통시장 건너편에 하나은행 앞에서 버스를 탄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도 버스가 있다.)

현충사가 종점이기 편하게 갈 수 있다. 

버스 번호 : 900번, 910번, 920번 (20~30분 소요)

가는 길에 온양민속박물관, 은행나무길에서도 정차한다.


현충사와 함께 둘러보아야 할 곳이 이충무공 묘소다. 현충사에서 불과 9km 떨어져있다. 아산 버스 여행을 한 내게는 이동이 불편해서 빼놓은 곳이지만 차를 가지고 여행한다면 들러볼만하다. 애초에 현충사를 이순신 장군묘과 함께 만들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거니 싶다.




2개의 연못이 있는데 위연못이 700평, 아래연못이 천평정도 된다. 연못 안에는 잉어, 붕어, 새우 등 5천마리의 어류가 바글바글하다. 연못 앞에 300년된 느티나무가 있다. 높이가 20미터 둘레가 4.8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로 뜨거운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어서 보통 마을의 정자목으로 많이 심는다. 뜨거운 여름 현충사를 찾는다면 이 나무 아래 앉아 연못의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며 쉬는 것도 좋을 거 같다. 가을로 진입하는 날들이기에 벌거숭이 나무들이 많은데 그 사이에 빨간 열매가 가득한 나무, 목련의 봉우리들 모과나무가 눈에 띄었다. 앙상한 가지의 달린 작은 생명들이 예쁘고 인상적이었다.




구본전. 지금은 박정희 때 지어진 본전 건물이 있지만 현충사가 처음 지어졌을 때 원래 이 건물이 본전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구(!)본전이다.  1706년 이순신장군 사당으로 지어졌다가 1800년대말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면서 함께 없어지기도 했다. 구본전의 기둥에 보면 글이 쓰여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런 것을 주련이라고 하는데 현충사 구본전의 주련은 위당 정인보에 의해 쓰여진 글이다. 그 내용을 보자면

바다와 산에 맹세하므로 강상을 후세에 이르도록 세웠으며

천지를 구해냈으되 내세워 자랑함이 없었네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니 지극한 충성은 단군이래 빛나고

크고 밝은 공덕은 온 나라를 덮었네. 

구본전 뒤에 감나무가 하나 보였다. 새빨간 감 수백개가 달려있는 모습이 이상적이다.



홍살문충의문을 지나면 본전에 다다른다. 본전은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현재 현충사의 중심(?) 건물이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장우성 화백이 1953년에 그렸다. 지금은 이 영정이 이순시 장군을 대표하는 국가 표준영정이 되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데 열린 문으로 안으로 들여다보면 안쪽 벽으로 그림이 가득하다. 이순신의 삶에서 중요한 10가지를 그려놓은 십경도다. 이곳에서 매녀 4월 28일 제전이 열린다. 박정희때 만들어진 것이어서 인지  본전 앞에 박정희 헌수 나무도 심어져있다.




충무정. 이순신 장군과 그의 가족들이 쓰던 우물이다. 이 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마실 수 있도록 컵이 준비되어있다. 중앙생명과학원에서 실시한 음용수 가능 시험 결과가 옆에 붙어있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다. 수백년간 이어져오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처럼 이 물도 그 때 그대로인가보다.



옛집. 충무공이 무과에 합격하기 전에 살던 집으로 그 후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았다. 집 뒤쪽에 위패를 모신 가묘가 있어 기일(음력 11월 19일)에 제사를 지낸다. 집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로 담 안쪽에 디긋자 모양으로 되어있다. 특이한 것은 대문을 들어가지 않고 옆쪽으로 문을 윗쪽으로 올리는 방식의 방이 있다는 점이다. 한옥을 짓는다면 이런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마당에는 우물과 장독대들이 놓여져 있다. 바로 이 옛집 옆에 우물이 있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이 집이 처음부터 여기 있던 것인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옮겨왔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집만 마을에서 동떨어진 곳에 있었을리 없는데 그럼 근처 있던 집을 모두 없앤걸까.



충무공 옛집 옆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00년이 넘는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이 거대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장관이라고 한다. 두그루 모두 암나무로 많은 은행이 떨어져있었다. 이 앞에는 전통 활쏘기 체험장이 있는데 12월이어서 운영되고 있지 않았다. 활쏘기 체험은 3월 ~ 11월중 14~16시에 진행요원의 지시에 따라 할 수 있다.



이충무공후손의 묘. 위에서부터 이순신 장군의 3대, 4대, 10대손의 묘이다. 왜 2,3,4.... 나란히 없고 이렇게 모셔져 있는지는 모르겠다. 정작 이순신 장군의 묘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라산에 있다.


이면공 묘. 이면공은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이다. 똑똑하고 운동도 잘하는 문무를 두루 갖춘 아이로 이순신이 굉장히 아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와 어머니(이순신의 부인)가 머물던 마을까지 밀고들어온 왜와 싸우다가 죽었다. 이면공의 나이 고작 21살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의 마음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있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은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남달리 영특하므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있게 하지않는 것이냐?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2011년에 지어진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다양한 전시물이 있으며 교육활동도 이루어지고 있다. 토요일마다 어린이 충무공학교가 열려서 아이들과 함께 하기 좋은 곳이다. 현충사 경내와 이 충무공이순신기념관 곳곳에서 강의와 함께 활동지로 학습프로그램이 이루어진다. 매주 토요일(10:30 ~ 12:00). 단지 대상의 연령과 인원이 한정적이다. 초등학교 4~6학년 50명 이내다. 단체접수를 환영한다는 안내문과 함께 선착순 전화접수(041-539-4612)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기념관은 4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하에 4D 영상체험관도 운영된다. 평일에는 1시간 단위, 주말 운영되어서 보고자 한다면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충무공 장검은 1594년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진중에 있을 때 만든 칼로 보물 326호다. 전장에서 실제로 쓴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정신을 가다듬기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칼날에 자세히 보면 이순신 장군이 직접 새긴 글이 있다. 특별한 건 아니고 '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는 내용 ㅎ


임진장초는 국보 76호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장계들을 다른 사람이 따로 옮겨 적은 책이다. 전란 당시의 출전 경과, 일본군의 정황, 군사상 건의 사항, 진중의 경비 상황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의 하나로 꼽힌다. 이곳의 전시물은 복제된 것이다.


최근 명량해전 지역에서 발견된 소소승자총통이 최초로 공개되고 있다. 

사부유서. 이순신이 1594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받은 유서이다. 유서란 조선시대 임금이 군사권을 가진 관원에게 내렸던 명령서로 이 유서를 내릴 때 왕은 발병부를 함께 내려주었다. 보물 제 1564-5호. 보물 1564호로 되어있는 문서들이 여러장 연달아 전시되어있다. 뒤에 다시 이후의 숫자만 다를 뿐이다. 함께 묶여서 보물로 지정된 것 같다.

요대. 보물 326호로 명나라의 요대다. 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장군에게 선물 받았다고 한다. 난중일기에 금대 하나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이것이 그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일부가 무소뿔로 만들어져있다.



지하에 있는 기획전 전시실에서는 지난 7월부터 전시중인 난중일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기념 전시 <전장의 기록에서 세계의 기록으로>가 12월 30일까지 계속되고 있다. 난중일기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나 위대한 위인이니까가 아니라 그의 글이, 그 글의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난중일기의 일부 내용이 쓰여있었다. 나도 다시 일기를 적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병사들의 노고를 풀어주다

병신년(1596) 5월 5일 신미

맑음. 이날 새벽에 여제를 지냈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나가 공무를 보았다.

회령포 만호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여러 장수들이 와서 모이고 그대로 들어가 앉아서

위로주를 네 순배 돌렸다. 경상 수사는 술잔 돌리기가 한창일 때쯤 씨름을 시켰는데

낙안 군수 임계형이 일등이었다. 밤이 깊도록 이들을 즐겁게 뛰놀게 한 것은 굳이

즐겁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에게 노고를 풀어주고자 한 계획이었다.


어머니를 뵈다

갑오년(1594) 1월 11일 경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를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바로 고음천에 도착하였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과 함께 갔다. 어머님께 가서 배알하려 하니 어머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니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날 저녁에 손악수의 아내가 죽었다는 부음을 들었다.


적을 쳐부수다

임진년(1592) 6월 2일 경자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곧장 당포앞 선창에 이르니, 적선 이십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우리 배가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의 판옥선만 하였다. 배 위에는

누각을 꾸몄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을 비오듯 마구 쏘아 댓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든 왜적이 한꺼번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 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었고 모조리 섬멸하여 남겨 두지 않았다. 얼마 후

큰 왜선 이십여 척에 부산에서부터 바다에 줄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로 들어갔다.



난중일기 초고본. 국보 76호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속정유일기, 무술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기간 친필로 기록한 일기로 임진왜란 사료로서의 가치는 물론 개인의 내면과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한 일기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