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은 기대되는 영화가 아니었다. 강간과 살인 그것도 청소년 범죄라는 점과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등급을 가지고 있는 영화. 영화가 담고 있는 이미지들이 분명 불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편한 것은 피하고 본다. 문제는 이 불편함이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방황하는 칼날>의 원작 소설을 쓴 히라시노 게이고는 일본에서 일어난 콘크리트 살인사건(청소년들이 여학생을 감금, 성폭행, 토막 살해 후 콘크리트에 부어 강에 유기했지만 소년법에 의해 가벼운 처벌을 받은 사건)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 3월 군산에서는 거리에서 15살의 딸을 성폭행한 19살 소년을 찔러 죽인 아버지가 있었다. 청소년 범죄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청소년이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가정(?)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기에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같은 범죄지만 성인과는 다른 형량을 부여한다.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히 한쪽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 범죄는 성인 범죄와 다를 바 없다?

형사 억관(이성민 분)에게는 범죄에 애 어른이 따로 있지 않다. 얼마전 억관은 자신이 담당했던 사건의 가해 소년에게 폭언을 쏟아부었다가 질타를 받았다. 그 가해 소년은 게임팩 때문에 친구를 혼절하도록 패고 불로 지져서 깨우고 패기를 반복했지만 지금은 즐겁게 농구를 하는 소년이었다. 가해 소년은 그 끔찍한 범죄가 성장의 발판이 되었을 뿐인데 피해 소년은 평생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상현(정재영 분)에 의해서 철용(가해 소년 중 하나)이 죽은 후 철용의 부모는 슬픔과 분노로 경찰서에 앉아있다. 자신의 아들이 죽었으므로 그가 아무리 나쁜 짓을 했든지 그건 무방하다는 태도다. 그 방 건너에 오열하며 주저앉는 여자가 한 명 더 있다. 철용 등에게 성폭행 당하고 결국 자살한 소녀의 어머니다. 우습게도 가해자가 권력을 가진 것 처럼 보인다. 권력자들은 평생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산다.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그 권력으로 쉽게 빠져나간다. 간혹 극형에 처해지기도 하지만 한 평생 권력을 누리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면 한 순간의 처벌이 너무 가벼워 보일 지경이다. 반면 권력에 의해 휘둘리는 입장은 평생을 힘들게 산다. 결국 권력자가 처벌된다고 해도 평생의 시달림은 고스란히 시간과 함께 남아있다. 가벼운 처벌의 배경은 '개화'에 달려있다.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은 변할 수 있는가. 청소년 재범율은 매년 증가해 7년동안 2배 증가했다고 한다. 반면 성인 재범율은 줄어들고 있다. 그들은 영악하게 법을 이용하고 있었다. 한번의 실수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은 정말 소수의 미성년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조두식은 살아가면서 얼마나 수진이 생각을 할까.



<방황하는 칼날>은 잘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이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와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했다면 실망했을 지도 모른다. 최근에 그런 영화들이 꽤 있었다. '뭔가 있는 척(!)'했지만 결국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탄탄한 구성을 동반한 높은 완성도라는 점을 간과한 영화들 말이다. 영화가 끝난 후 놀란 건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는 것이다. 영화가 122분의 상영시간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다. 영화는 꽤 높은 몰입도를 가지고 있다. 복잡하지 않은 스토리 구조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영화였던 것이다. 과하지 않은 영상과 음악,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의 힘이었을 것이다. 정적인 장면에서도 화면은 조금씩 흔들린다. 100% 핸드헬드로 촬영된 영상은 방황하는 칼날처럼, 상현의 마음처럼 끊임없이 흔들린다. 상현(아버지)과 억관(형사)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둘의 갈등처럼 풀어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상현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아내도 암으로 보내버렸다. 영화 속 형사와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 관객까지도 상현의 감정에 매몰된다. 그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게 흘러간다.


무능한 법과 국가기관.

청소년도 성인과 똑같이 처벌 받는다면? 아니 오히려 지금보다 법이 더 강한 잣대로 범죄에 벌을 가한다면 상현은 복수를 꿈꾸지 않았을까? 두식, 철용이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철용의 집으로 달려가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 그의 분노를 표출할 곳은 가해자 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남은 삶은 없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삶의 생각하지 않았다. 관객들도 가해 청소년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관객은 어린 가해자들 뿐 아니라 법과 국가기관에 대한 분노도 함께 느낀다. 상현은 그것을 표현하지 않지만 영화 속에서는 관객에게 이런 것을 소구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상현에게 맞아 죽은 철용의 집에서 성폭행 영상을 담은 cd 수십개가 발견된다. 그 동안 그들은 단 한번도 잡히지 않았다. 절도 행위로 경찰에 불려간 적이 있을 뿐이다.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지만 우리의 사회 안정망은 그것을 바로잡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상현의 조력자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가해자들의 범죄를 돕기도 한 민기와 성폭행 당했지만 두식과 함께 있던 소녀는 우리 사회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들은 국가기관이나 법을 믿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두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민기는 도망갔고 소녀는 두식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두식이 두려워 두식의 조력자가 되어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청소년 범죄의 재범율이 나날이 늘어나는 것을 본다면 청소년 범죄도 성인 범죄와 똑같은 처벌을 해야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능사 일 리 없다. 청소년은 실제 온전한 판단을 하기에 미숙한 존재이고(사실 17살 정도 되면 그런 것 같지 않지만... 처벌의 수위를 완화하는 조건의 나이대를 좀 더 낮춰야하지 않을까?) 올바른 삶을 살 기회를 어른보다는 더 주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선택보다는 범죄로 내몰리는 상황에 처한 미성년자들이 성인보다는 많을 것 같다. 

상현이 야근을 하지 않는 직장에 다녔다면 수진은 죽지 않았을까? 민기가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수진은 살아 있을까? 최소한 두식과 철용이 처음으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들을 붙잡고 재범을 막았다면 수진은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동네에 방치되는 목욕탕 같은 곳이 없었다면 수진은 살아 있을 지 모른다. 사건 후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해자가 부끄러워하며 죄책감을 갖는 정상적인 사회였다면 수진 오늘도 상현에게 투덜거리는 문자를 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가정이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오늘 밤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피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가해자다. 어떻게 해야할까? 


소설 원작 영화 추천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수 많은 문장들을 2시간 정도의 이미지 나열로 옮기면 소설만큼의 밀도 높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경우가 파다하기 때문이다. 다행이랄까? 소설 <방황하는 칼날>을 보지 않아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이정호 감독의 전작들을 찾아보니 <베스트셀러>가 있다.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꽤 재밌게 보았던 영화였던 기억이 남아있다. 아무래도 이정호 감독의 다음 영화도 꼭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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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바웃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