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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차이나 여행기

[난징] 주원장의 무덤 명효릉 in 중산공원


 명효릉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무덤이다. 한 왕조를 세운 사람의 무덤답게 굉장히 크다. 30년동안 만들어지면서 갓 탄생한 국가를 파탄 시킬 위험까지 몰아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후 오랜시간이 지나고 많은 전쟁이 일어나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된 상황이다. 주원장은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 거리를 헤매며 살아야했다. 당시 시대가 혼란해서 도적과 난이 횡행했는데 그도 먹고 살기 위해 홍건적의 난에 참여했다.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결국은 군을 통솔하고 명나라를 세우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명효릉은 난징의 중산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중산공원은 난징중산 풍경명승구로 불리는데 굉장히 넓은 면적에 명효릉 뿐 아니라 중산릉, 손권묘, 영곡사, 쉬안우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워낙 넓어서 각 스팟으로의 이동은 작은 셔틀을 타고 이동해야한다.


http://www.zschina.org/

관광차 편도 5위엔

입장료 90위엔

운영시간 7:30 ~ 18:00





거대한 나무들이 늘어선 길 사이를 셔틀을 타고 달린다. 처음에는 관광 셔틀만 다닐 수 있는 길인 줄 알았는데 일반 승용차와 버스들이 다니는 것을 보면 그건 아닌가 보다.





 금수교는 일명 오용교라고 하며 다리와 릉궁은 동일한 남북중축선에 놓여져 있다. 다리는 돌로 된 아치형모양으로 5채가 나란히 놓여져 있어 정북쪽 200미터 안의 5개 릉궁문과 대응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3개의 다리기초부분과 양안의 받침들만 명나라 유물로 남아있다. 문무방문은 명효릉 릉실의 첫번째 문이다. 1998년 중산릉 관리국에서 명효릉 규격제도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담벽 아래 보존된 일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어, 러시아어 6개국 문자로 조각된 '특별고시'비는 청나라 함풍원년 (1909년) 양강총독국과 강녕부지부회에서 명효릉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비다. 향전 앞 동서양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색, 녹색 유리기화로 아주 영룡하게 지어졌다. 로정은 단연사면식이며 중간에 권문이 있고 문내에는 작은 칸이 있는데 제사용 신백(비단)과 축판을 태우는데 사용된다. 비전은 청나라 강희황제때 지어졌는데 1699년 강희황제가 제 3차 강남시찰 때 건축이 심하게 파괴된 상황을 보고 "강소군정을 순시하는 대신 송락과 직조관원 조연은 공동으로 보수하라"고 성지를 내렸으며 어필 "치융당송" 네글자를 조연(홍루몽 작가. 조설근의 조부)한테 맡겨 비에 새기도록 명하였다. 비 양쪽에는 건륭황제의 글자가 적혀있는 어비가 보존되어 있다.




 향전의 원명은 효릉전이며 명효릉의 중요한 건축 중 하나로서 명나라 홍무제 16년(1383년)에 완공된 것이다. 향전은 주원장과 황후, 임금의 소실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세층의 돌을 쌓아만든 기초 위에 건축된 정면 9칸, 측면 5칸의 거대한 나무 구조의 건축으로서 지금도 56개 주추돌이 보존되어 있다. 본래 건축물은 청나라 때인 1853년 전란에 파괴되었고 동치년간에 다시 보수되었다.






 승선교는 아치가 하나인 석조다리이며 다리길이가 57.5미터 넓이가 26.6미터, 양쪽에 석조각 난간이 있는데 주원장의 영구가 이 다리를 거쳐 지나갔었기에 승선교라고 한다. 다리 지나 7.8미터 뒤에는 바로 방성이다.  명루는 명효릉이 처음 개척한 건축형식으로 방성 쉬에 건축되었으며 명효릉 건축의 최고점이다. 지붕은 중연구척에 황색 오지기와로 덮혀졌고 남쪽에 아치형 문이 3개 있고 동, 서, 부쪽에 각각 아치형문 1개씩 있다. 벽돌로 바닥을 깔았다. 청나라 함풍년시기 지붕이 전란에 회손됐다. 2008년 6월부터 1년에 거쳐 지붕 수리 보호 공저을 실시했다.






 명루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바로 앞에 있는 길 뿐이다. 명효릉 전체에 울창한 산림이 조성되어있는데다가 명루가 높기는 하지만 주변 풍경을 모두 조망할만큼 높지는 않다. 명루 뒤쪽의 야산이 주원장이 묻힌 무덤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무덤 위를 관리하지 않고 풀과 나무가 우거지는데로 두기 때문에 무덤인지 알 수가 없다. 그 크기 또한 우리나라의 왕릉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크다.




 석상로는 효릉신도의 첫 부분으로서 길이가 615미터이며 사자, 해태, 낙타, 코끼리, 기린(전설상의 기린), 말 등 6종류의 석수가 차례대로 세워져 있다. 이 석수들은 하나의 큰 돌을 이용하여 원조조각기법으로 만들어졌으며 조각선이 선명하고 부드럽고 기백이 웅대하고 품격이 호탕하다. 이는 황제릉의 숭고, 성결, 화려함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보호, 해를 제어, 예의를 상징하고 있다. 웅중로는 효릉신도의 두번째 부분으로 길이가 250미터이며 중도에 한 쌍의 맞기둥, 두쌍의 무관과 두쌍의 문관으로 나열되어 있다. 맞기둥 위에는 원주형 돌로서 구름과 용을 조각하였는데 당송 시기 이래의 신도기둥 위에 조각한 연화 꽃모양의 조각과 달리 새로운 특색을 가지고 있다. 문관과 무관은 위엄있고 단정하며 릉의 충실한 보호자이다.





 릉 앞에 낙타를 세워 놓은 것은 명효릉이 처음이다. 낙타를 세워 놓음으로 하여 국력이 강성하고 서역의 안녕, 국가의 번영을 상징한다.





 기린은 고대사람들이 상상해낸 길한 동물이며 호랑이, 사자, 소, 용의 형태를 한 몸에 가지고 있는 동물로서 황제의 인덕으로 나타난 길한동물이며 황제릉에만 사용될 수 있는 어용품이다. 해태는 곰의 눈과 독뿔을 가진 동물이며 또한 법수로 불려지는 전설 중의 신수이다. 만일 두 사람이 싸울 때 반드시 그 머리 위의 독뿔로 부정적인 사람을 찍어놓는다. 릉 앞에 세워놓음은 정직함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데 있다. 사자는 짐승의 왕으로 존칭되고 있으며 영활하고 용맹하여 다른 짐승들이 무서워한다. 또한 불교에서는 호법의 영물로 여긴다. 릉 앞에 놓여진 석사자는 황제의 위엄과 세력의 강대함을 보여준다. 석코끼리는 조형이 간단하고 생동하다. 동한시기에 이미 황제릉에 석상을 비치한 사계가 있고 명나라때에도 이어받아 사용했다. 말은 명나라때 조회의식때 황제경위대오중의 조성부분으로서 릉앞에 반드시 비치되는 동물이다. 석마의 두 눈의 눈빛은 살아있듯이 의기양양하며 마치 황제생전의 공적을 자랑하는 듯 싶다.





 근엄하게 서 있어야할 것 같은 석상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참 귀엽다는 것을 알게된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