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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마포여행] 기독교와 천주교 성지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양화진&절두산


 내게 마포구는 홍대와 상암 월드컵 경기장으로 대표되는 이미지였기에 시끌벅적한 축제의 동네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런 마포구에 기독교 성지와 천주교 성지를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물론 이 곳들은 종교 성지인만큼 고요하다. 합정동에서 만날 수 있는 이 곳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과 절두산 순교성지다. 이 두 곳은 지척에 자리하고 있어 손쉽게 두 곳을 한 번에 다녀올 수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이들의 무덤 앞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글이 쓰여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읽다보면 단순히 선교만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화기 조선에서는 선교가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교육기관, 병원 등 사회시설로 조선으로 들어왔고 사회 봉사와 함께 정치적으로도 연결되는 부분도 많았다. 훗날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의 독립에 힘을 보탠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양화진에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조성된 것은 헤론의 죽음이 때문이었다. 알렌에 이어서 광혜원의 원장이 된 헤론은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이질에 걸려 1890년, 34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당시 헤론의 시신을 어디에 매장할 지가 화급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삼복더위 중에 시신을 당시 유일하게 외국인 묘지가 있던 제물포까지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유족과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 허드를 통해 한성 가까운 곳을 매장지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마침 조선은 통상지역 안에 외국인의 묘지를 무상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수호통상조약을 영국과 체결하고 있었는데 미국 공사 허드는 최혜국 조관을 근거로 헤론의 매장지를 한성 가까운 곳에 요구했던 것이다. 이에 조선교섭통성사무 독판 민종묵과의 급박한 서신 왕래 끝에 양화진이 매장지로 정해졌다.





양화진외국인 선교사묘원

개장시간  오전 10시 ~ 오후 5시

홈페이지   http://www.yanghwajin.net/

주소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4

전화번호   02-332-9174


무료안내(월~토)

양화진봉사관 : 오전 10시, 11시 30분.  오후 2시, 3시 30분.

양화진홀 : 실내 리뉴얼 공사중 (재개관일 : 10월 2일)





 선교사 묘원의 묘비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국전쟁때 포탄을 맞은 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비석이 눈에 띄었다. 겜블 선교사의 무덤이다. 베아트리스 갬블 선교사(Gamble, Beatrice Jenkins 1879~1927)는 1879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리틀톤대학과 내슈빌 감리교 선교사훈련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1908년 갬블 목사와 결혼한 후 함께 내한하여 선교사의 길을 걸었다. 그녀는 남편의 선교사역에 항상 주의 깊게 헌신하고 조력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1927년 1월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갬블(Gamble, FosterKirk: 1880~1969) 선교사는 1880년 앨바배마에서 태어나 남버밍햄대학과 밴더빌트대학 신학대학원을 나와 고향에서 수년 간 목회했다. 갬블 선교사는 1908년 10월, 아내와 함께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개성, 춘천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였다. 1915년 미국으로 돌아가 선교부에서 활동한 후 1921년 다시 내한하여 목회에 헌신했으며, 협성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1927년 아내 베아트리스 선교사가 사망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목회자로서 문서선교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에서 간사로 활동했는데 1940년에는 미국 감리교 본부 산하에 해외구제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생화가 무덤 앞에 놓인 곳의 주인은 캠벨 선교사였다. 그의 후손들이 다녀가기라도 한 것일까? 배화학당을 세운 사람이니 배화여중, 여고 학생들이 다녀간 걸까? 궁금해진다. 캠벨 선교사(1853-1920)는 1897년 44세 때 한국에 들어와서 배화학당을 세우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에 헌신했다. 캠벨은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인 27세 때 남편과 사별하였고, 두 자녀도 병으로 잃었다. 그녀는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 일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학교에서 수련하고, 33세 되던 해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서 상해와 소주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였다. 캠벨은 1897년 10월 남감리회 첫 번째 여성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녀는 1898년 10월 2일 지금의 종로구 내자동에 여성들 대상으로 학당을 열고, 여성을 아름답게 꽃 피워내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배화학당이라 이름지었다. 캠벨은 미국인 루이스 워커의 기부금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였는데, 정기예배가 이곳에서 드려졌다. 정기예배는 이후 종교교회와 자교교회로 발전하였다. 캠벨은 1918년 65세 때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병을 앓았으나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1920년 11월 12일 67세의 나이로 소천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일가족 모두의 비석이 세워진 곳에는 빈턴 가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빈턴 선교사(1856-1936)는 1856년 미국에서 태어나 1891년 아내 레티샤 선교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빈턴은 복음전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정부 병원이라는 한계 때문에 마음대로 복음 전도를 병행하기 어려운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자택에 개인진료소를 마련해 민중들을 대상으로 치료와 복음전도에 노력했다. 결국 빈턴 선교사는 1893년 11월 제중원 원장을 사임하고 평양, 의주, 만주 지역을 돌며 전적으로 복음전도 사역에 힘을 쏟았다. 그는 1894년 선교사공의회 출범을 계기로 <The Christian news>, <The Korea Mission Field> 발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문서선교에 헌신했는데 1905년에는 <The Korea Mission Field>를 월간으로 바꾸고 수년간 편집인으로 일하면서 선교잡지로 정착 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는 1908년 선교사를 사임하고 귀국했으며, 1936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아내 레티샤 선교사는 1873년 영국에서 태어나 빈턴과 결혼한 후 함께 내한하여 선교사역을 도왔다. 그러나 내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자녀를 잃는 슬픔으로 인해 건강을 해쳐 30세 되는 해인 1903년 사망하고 말았다. 1908년에는 딸마저 사망함으로써 양화진에는 모두 4가족이 안장되어 있다.





 우뚝 솟은 빌딩들 사이에 조용하게 내려앉은 공동묘지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동묘지의 분위기는 아니다. 공원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이곳에 묻힌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알아갈 수록 점점 따뜻한 공간이 되어간다.




 헐버트(1863-1949)는 '한국의 은인',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는 23세 때 국립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처음 한국에 와 5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한 후 귀국하였다가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왔다. 헐버트는 주로 문서선교에 헌신했는데, 그가 한국에 관해서 쓴 글들은 한국을 외국에 알리는 창구가 되었다. 그는 1903년에 창설된 한국 YMCA의 초대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헐버트는 특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고종황제의 밀사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서 외교적인 도움을 호소했으며, 1907년에는 고종에게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적인 통로로 활용하기를 권고하여 이준 등 세 사람의 밀사를 파견토록 하였다. 헐버트 자신도 헤이그로 가서 유럽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으로부터 비자금을 독립 운동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리해 달라는 밀명을 받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노력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된 후에도 헐버트는 강연과 기고를 통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헐버트는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7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국에 다시 왔다가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서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는 태어난지 1년 만에 죽은 아들도 묻혀있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관광지가 아니라 기독교 성지이므로 흔히 관광지에서 하게 되는 행동들을 해서는 안된다. 묘원 옆에는 기념관도 함께 있으니 같이 들리면 좋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서 나와 절두산 순교성지로 향했다. 선교사 묘원을 나오니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양화진의 옛터인 이 일대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였다. 영조 30년(1754)에는 한강수로의 경비를 통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이곳에 군진이 설치되어 상비군이 주둔하였다. 이 곳을 양화진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군진 옛터의 일부를 장대석으로 구획해 놓았다.




 절두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는 19세기말 병인양요로 박해 받던 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던 곳이다. 이곳의 이름이 머리가 잘렸던 봉우리를 지칭하는 단어인 것이다. 절두산 꼭대기에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고 지금은 천주교 성지로서 성당이 지어지고 기념관도 자리잡고 있어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찾고 있다. 절두산에서 처형이 이루어지고 있던 동안에는 새남터나 서소문 밖에서 신자들의 처형이 행해지지 않았다. 당시 참수를 받은 신자들은 모두 절두산에서 처형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1866년 10월 23일부터 신자들의 처형지를 갑자기 절두산으로 옮긴 것은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맞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9월에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10월에 다시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도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함대의 침략을 도왔고,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최선일·최인서·심순녀 등 3명의 신자들이 물길 안내인으로 고용되어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거슬러 오는 것을 도왔다. 그뿐 아니라 장치선, 송운오, 이성의, 이성집, 박복여, 김계소 등의 신자들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몰래 프랑스 함대로 찾아가 천주교 박해 상황과 조선의 군사들이 전등사로 대거 집결한다는 군사 정보를 알려 주기도 하였다.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하면서 그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함대가 침략해 올 수 있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이 처형지를 절두산으로 옮기면서 포고한 글에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의 배로 더럽혀졌다.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홈페이지  http://www.jeoldusan.or.kr/

주소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전화번호  02-3142-4434



 절두산 순교성지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기념물을 여러개 볼 수 있는데 그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이자 신교자라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순교한 나이는 고작 26살이었다고 한다. 믿음이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눈을 감고 앉아서 기도하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각상의 손이 반질거린다.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도록 많은 이들이 그의 손을 맞잡았기 때문일까.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의 동상도 있는데 그가 1984년 5월 3일 방한해서 이곳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옛 양화나루의 동쪽 언덕에 있는 절두산 성지는 해마다 국내 각지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의 이방인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성지이다. 1984년 5월 한국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특별 방문했을 때도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서울시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이곳 절두산 성지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곳에서 천주교회 공동체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던 한국 순교자들에게 뜨거운 경의를 표하고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최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한해서 뜨거운 화제가 되었는데 80년에는 요한 바울로가 그랬나 보다. 





 흔히 보던 성모상과는 다른 모습이어서 인상적이었던 이 성모상은 1984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최종태 교수가 제작해서 2001년 이전에는 성지 내 성모동굴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오르막길을 올라서 절두산 꼭대기에 있는 성당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있었다. 미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많은 분들이 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믿음이 수백년간 이어오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많은 이들의 죽음이 있었던 그 땅에.




십자가의 길 끝에 많은 유적들이 모여있었다. 순교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런 까닭에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로 불리는 박순집(베드로: 1830-1911)의 묘와 묘비를 비롯해서 아래의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

박순집 일가의 공적비 - 1979년 9월 26일 복자 축일을 기하여 김몽은(요한) 신부의 집전으로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면서 그의 부친 박 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공적비'를 세웠다.

남상교(아우구스티노: 1783~1866)의 청덕거사비 - 남상교는 성인 남종삼의 백부이자 양부이다. 현풍의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어려울 때마다 백성들에게 많은 선정을 베풀어 이 비가 세워졌다.

성 남종삼(요한: 1817~1866)의 흉상 - 병인박해(1866년) 당시 참수형을 받고 그의 나이 50세에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것을 기념하여 이 비가 세워졌으며, 그는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남종삼의 순교사적비 - 1980년 6월 29일 성인 남종삼의 후손들이 그의 순교사적을 기리는 뜻으로 세운 것이다.

은언군(1755~1801). 송마리아(~1801)의 묘비 -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과 그의 부인 송 마리아는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신유박해 때 대역죄인으로 몰려 사사되었으나, 철종 2년(1851년)에 사면되어 이 비가 세워졌다.

해운당대사 의징지비 -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배경이자 기원이 된 강학 장소인 천진암 주어사 터에서 발견된 비다. 1689년 해운당 의징 스님의 상좌 수견천심 스님이 세운 것이다.




 오성바위 다섯 성인들이 잠시 쉬어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바위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장주기 등은 처형지인 갈매못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그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이 넓적한 바위에 앉아서 신앙을 다짐했다고 한다. 복자 바위라고 부르다가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오성바위 오른쪽에 있는 것은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1818-1866)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이후 충청도 합덕의 신리에 있는 교우촌에 머물렀는데, 이 문지방돌은 당시 마련된 임시 거처에 있던 것이다. 척화비는 국사시간에 배워서 모두에게 익숙한 비석일 것이다. 천주교 성지에서 척화비를 처음 만나게 되니 아이러니하다.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양인을 배척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이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좌) 오성바위, 문지방돌  (우) 척화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갓이 아니라 저런 모자를 쓰고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던 동상의 주인공은 이승훈 베드로(1756~1801)였다. 최초의 한국인 세례자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평창이고 자는 자술, 호는 만천이다. 그는 일찍부터 서양의 수학에 관심을 가져왔으며 1784년 봄 북경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에 귀국하여 같은 해 겨울에 동료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2월 26일(양력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독특하고 거대한 조각상인 절두산성지 순교자기념탑은 절두산 성지 순교자들이 새겨져 있다. 그들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있는데 그 옆에는 세례명, 한자, 연령, 직업, 순교일까지 쓰여있다. 대부분은 1866년에 순교했다. 이들은 가족 관계가 많았다. 30명이 넘는 순교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