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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부산 동구 곳곳을 누벼라] 부산 동구 곳곳을 헤매다

  난 왜 부산 동구를 헤매게 된 걸까? 그건 작은 실수 하나 때문이었다. 내게는 [골목따라 계단따라 동구이바구길]이라는 지도가 있었다. 이 지도에는 초량이바구길, 호랭이이바구길, 부산의 부산이바구길, 이중섭의 범일동풍경과 마사코(이남덕) 전망대의 코스와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단 한 번도 길을 잃지 않고 초량이바구길을 걸은 후에 자신감이 충만해져 있던 난 호랭이이바구길과 부산이바구길을 걷고자 길을 나섰다. 먼저 호랭이이바구길! 지도대로 현대백화점에서 시작했는데 그 후로 지도에 표시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초량이바구길은 지도를 보지 않아도 골목에 표시가 잘 되어있었는데 호랭이길은 도대체 두번째, 세번째 스팟이 어디인 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2시간 이상 길을 헤매다가 부산 이바구길로 향했다. 이미 산비탈 골목에서 길을 헤매다가 부산의 부산이바구길 마지막 스팟인 증산공원에 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로 길을 걷고자 했다. 근데 이건 또 뭔가... 길을 따라 걷는데 그 사이의 모든 스팟은 어디있는 지 찾을 수 없고 자성대공원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중섭 거리를 만나서 그 길은 걷고 왔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긴걸까? 난 이 포스팅을 쓰고 있는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지도 구석에 초량이바구길을 제외한 다른 길은 '조성중'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다행이도 이중섭의 범일동풍경은 지난 5월 조성이 완료되어서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 난 왜 저 '조성중'이라는 단어를 보지 못했을까? 이건 전부 초량이바구길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초량동 일식가옥을 찾아 나섰는데 지도에 표시된 곳에서 주위를 살펴봐도 찾을 수가 없다. 지도를 보고 있던 내게 다가온 동네 할머니도 정란각은 알겠는데 여긴 어딘지 모르겠단다. 그래서 정란각으로 향했다. 그.런.데 2012년부터 시작된 복원 공사는 2년이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안에 들어갈 수 없음은 물론 건물 밖에 가림막을 해두어서 외관을 보기도 힘들었다. 정란각은 1939년에 철도청장 관사로 지은 고급 일본식 건물이다. 일본 무사 계급들이 사는 전형적인 쇼인즈쿠리 양식으로 목조로 지어진 2층 집으로 기와지붕을 가지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여러번 재건되었지만 원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초량역을 나오니 큰 동상이 하나 보였는데 정발장군의 동상이라고 한다. 정발장군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절제사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당시 정발장군 뿐 아니라 이름 없는 수 많은 병졸들도 죽었을 것이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정공단도 만들어졌다.





부산역 앞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에 대한 설명은 이미 초량 이바구길의 이바구 공작소의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길게 늘여 놓아서 반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단지 9월말에 부산 차이나타운 특구 문화축제이 있었는데 가지 못해서 아쉬웠다. 처음에는 이 날짜에 부산 동구 여행을 떠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부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차이나타운에서 특별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차이나타운이라고 해서 중국 음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천의 차이나타운과 다른 분위기이며 이태원과 다르다. 이곳만의 특별한 분위기가 있다.




 부산 이바구길 지도상으로 보면 고바야왜성과 증산공원이 인접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냥 두 개가 합쳐져 있는 모양새 인 것 같다. 인근 주민들의 휴식과 운동 장소가 되고 있는데 여기저기 살펴보면 사선으로 쌓여있는 서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성이 수직으로 서 있다면 일본의 성은 사선으로 쌓여있어서 금방 표가 난다. 부산진성을 허물고 쌓은 일본 왜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골목을 헤매다 50년 전통에 냉면과 오뎅탕이라는 묘한 조합을 가지고 있는 식당이 있어서 들어갔다. 돌솥비빔밥, 쇠고기 볶음밥, 떡국, 만두국, 라면, 콩국수, 돈까스... 등 일반적인 분식점 메뉴가 다 있는데 메인 메뉴는  벽돌집 냉면(3,500) + 오뎅탕(2,500) = 5천원.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맛있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특이했다. ㅎ






 올 초에 개관한 안용복기념 부산포 개항문화관은 독도의 주권을 이야기할 때 항상 언급되는 안용복을 중심으로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 출정식, 부산과 일본의 교류 등을 담고 있다. 재밌는 건 부산의 개항은 근대라고 생각했는데 1407년에 부산 동구의 부산포가 개항했다는 것이다.






 호랭이 이바구길이 조성완료되면 이곳이 아마도 여공들의 주경야독에 대한 향수, 삶에 대한 스토리가 담긴 '누나의 길'과 한국전쟁 전후 형성된 '범일골목시장'이 아닐까 싶다. 어떠한 표식도 없기에 아닐 수도 있다. 대충 지도에 표시된 곳을 헤매다보니 이 곳들이 가장 그 장소들과 흡사해 보인다.





 골목길에서 굉장히 넓은 규모의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정공단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을 지킨 정발 장군과 병졸, 백성들을 기리기 위해서 1766년 만들어졌다.




 '친구의 거리'를 찾아 헤맸던 곳, 오래된 식당들이 있던 곳, 보림극장 버스정류장은 있으나 주위를 헤맸지만 보림극장 벽면에 1970년대 극장 성황 당시 공연포스터와 스토리를 게시했다는 곳은 찾지 못했다. 증산공원 근처에는 무지개빛으로 칠해진 아파트가 있다. 행복마을로 불리는데 '좌천동 행복마을 무지개나무숲'이다. 13개동의 아파트에 나무숲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으로 자연친화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주변의 색상과의 차별화되는 높은 채도의 색상을 사용하여 밝고 경쾌한 색감을 연출하고 곡선패턴을 통해 상승의 활기찬 기운을 느끼게 하였다. 저 멀리 높게 쌓여있는 콘테이너들. 전망이 끝내주는 곳이 위치한 동구 도서관.




 부산진지성(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 7호)은 흔히 자성대라고 부른다. 지금 남아 있는 성지는 임진왜란인 1593년(선조 26)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모리 테루모토가 부산진의 지성으로 쌓은 일본식 성이다. 그러나 원래 이곳에는 우리나라 부산진성의 외성이 있었다고도 한다. 일명 자성대라고도 하는 것은 부산진성을 모성이라 하고, 그 자식의 성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이라고도 하며, 산 정상에 자성을 만들고 장대로 사용하였다는 데서 나왔다고도 한다. 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지휘소로 이용했는데, 일본 장수의 이름을 따서 고니시성이라고도 불렀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에는 명의 만세덕군이 진주한 적이 있고, 그 후 만공단이 있었기 때문에 만공대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다시 쌓아서 부산진첨사영으로 사용하였다. 일제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에 따라 성이 철거되고 말았으며, 이 때 자성대 일대의 해면이 매축되어 옛 모습은 없어졌다. 남아있는 성지는 2단이며, 성벽의 높이는 최고 10m이며 최저 1.5m이다. 성벽은 비스듬히 경사져 있고,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며 나사모양으로 감돌며 좁혀 올렸다. 일본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지금 이곳에는 1974년에 시작한 정화공사로 신축된 동문인 진동문, 서문인 금루관, 장대인 진남대가 복원되어 있다. 또 명나라 장수 천만리의 후손이 세운 천장군 기념비와 고려 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최영 장군 비각이 경내에 보존되어 있다.






 자성대공원 정상부에 진남대가 있다. 장군의 지휘소였던 진남대의 '진남'이란 부산진지성 남문의 이름이다. 1974년 부산진지성을 정비하면서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규모의 팔작비중으로 증층누대를 설치하였다. 관람안내 07~18시.




 천장군 기념비. 명나라 장수였던 천만리는 임진왜란 때 이여송 휘하의 총독으로 5군의 대장이 되어 그의 아들과 함께 조선에 출정하여 평양, 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도 울산 싸움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명군이 회군할 때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귀화하였고, 조정에서는 화산군에 봉하고 충장공의 시호를 내렸다. 일제강점기 철거된 기념비를 광복 후인 1947년에 다시 세웠다.



 영가대는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행과 관련 깊은 부산의 명소이다. 1614년(광해군 6)에 경상도 순찰사 권반은 부산진성 근처 해안이 얕고 좁아 새로 선착장을 만들었다. 이때 바다에서 퍼올린 흙이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는데, 이곳에 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었다. 1617년(광해군 9) 회답 겸 쇄환사였던 오윤겸이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이후부터 통신사행은 이곳에서 출발하고 돌아왔으며, 출발 전에는 이곳에서 안전 항해와 무사 귀환을 비는 해신제를 올렸다. 1624년(인조 2) 선위사 이민구가 일본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파견되어 와서 이 정자를 보고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하였다. 원래 동구 범일동 성남초등학교 서쪽 경부선 철로 변에 있었으나, 1910년경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로 소실되었고, 2003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부산진시장 뒤편 철길 옆에 영가대가 있었음을 표시하는 비석이 남아 있다.





 기와 지붕 너무로 고층 빌딩들이 서 있고 영가대 앞에는 자신이 마치 해태라도 되는 것처럼 얼룩 고양이 한마리가 앉아있었다.





 자성대공원 인근에서 조방거리축제를 알리고 있었다. 조방의 특화된 상권을 홍보하기 위해서 열리는 축제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