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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김천 여행] 직지문화공원,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백수문학관



 김천 여행을 할 때 가장 먼저 가게되는 곳은 직지사다. 직지사를 둘러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직지사 앞의 직지문화공원,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백수문학관에 들러야한다. 간혹 이 곳들의 존재를 모르고 직지사만 왔다가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다. 이 3곳은 직지사와 한 세트다. 직지문화공원은 직지사 주변의 난개발을 사전 예방하고자 직지사 앞에 21400평 규모로 2004년에 조성되었다. 직지천 계류가 공원을 가로 지르고 공원 중앙에는 음악조형분수대가 있다. 놀이 시설과 체육시설도 갖추고 있고 대형 폭포와 전국에서 가장 큰 장승도 서 있다. 국내외 조각가들의 조각 57점도 곳곳에 전시되어있는데다가 17만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서 아름다움을 더 한다. 아름다운 공원이기에 김천을 찾는 여행자들 뿐 아니라 김천 시민들의 휴식처도 되고 있었다.



 직지문화공원

주소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31-1

전화번호 : 054-420-6114







 직지문화공원 한쪽에 '고려성 나화랑 형제 노래비'가 서 있다. 고려성, 나화랑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데 형제로 한국 대중음악 1세대로 한국 가요 발전에 이바지 했다고 한다. 당연히 모두 김천 출신이다. 형제의 성이 다른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가명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나화랑(고려성의 셋째 동생)은 가요 무너진 사랑탑, 울리는 경부선, 닐니리 맘보, 도라지맘보, 향기품은 군사우편, 뽕 따러 가세, 가야금 타령, 청포도 사랑, 비의 탱고, 이정표, 이국땅, 낙엽의 탱고, 핑크 리본의 카드, 열아홉 순정, 님이라 부르리까, 정동대감, 울산 큰애기와 군가 멸공의 횃불 등 생애 500편의 가요를 남긴 김천이 낳은 한국 대중가요 1세대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또한 그는 구전하던 우리 민요를 체계적으로 정리, 편곡하여 한국 최초의 민요 LP음반을 제작, 민요 보급에 앞장섰으며 서양의 맘보 리듬을 처음으로 한국 대중 가요에 접목시킨 선율의 마술사였다. 나화랑은 겨레의 유장한 정감을 정통가요에 담아내면서 송민도, 황금심, 손인호, 도미, 박재란, 남일해, 이미자 등의 가수를 발굴 및 배출시켰고, 라미라레코드사를 경영, 수 많은 음반을 양산하여 한국 대중가요를 크게 부흥시킨 음악인이었다.

 고려성은 한국 대중가요 토착기에 나그네 설움, 어머니 사랑, 비오는 해관, 춘소화월,마상일기, 금박댕기, 삼각산 손님, 자명고 사랑, 비에 젖은 주막집, 고향에 찾아와도, 아네모네 탁식과 8.15해방 가요 제 1호 4대문을 열어라를 탄생시킨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출신의 가요 작사가다. 그는 1930~50년대에 태평레코드사와 서울 레코드사 등에서 작사가 박영호, 가수 백년설, 박재홍 작곡가 김교성, 이재호 등과 함께 우리 민족의 애환을 대변해주는 가요를 양산, 보급시킴으로써 한국 가요예술을 진흥시킨 가요작가이다. 또한 고려성은 1939년 7월 29~30일에 조선일보와 태평레코드사가 공동 주최한 '태평레코드 예술상 전국 콩쿨대회'를 김천극장에 유치하여 한국 대중가요 1세대 가수 진방남, 태성호, 백난아 등을 발굴한 가요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나그네 설움

                                                          고려성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

1.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2. 타관 땅 밟아서 돈 지 십 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 속에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3.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 할 지평선에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갈쏘냐

-1940년 2월 태평레코드사 출반






 직지문화공원은 조각상들이 많아 거대한 야외 전시장 같기도 하고 다양하고 많은 나무들 때문에 식물원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참 예쁘게 잘 꾸며놓은 공원이다.





▼ (좌) 놀이터  (우) 김익수 작가의 '기도'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주소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91-1

전화번호 : 054-420-6726

관람시간 : 9시 ~ 18시

관람요금 : 일반 1천원, 청소년/학생/군인 500원.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연휴

홈페이지 : http://www.gimcheon.go.kr/mini/museum/



 김천 여행을 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볼 때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을 찾아봤을 때 실내 사진들을 올린 블로그들이 있어서 당연히 도자기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굳이 렌즈를 하나 더 챙겨 갔는데 막상 실내에 들어가보니 촬영 금지였다. 아쉽지만 눈으로만 살펴볼 수 있었다. 매표소가 따로 없고 출입구 왼쪽에 자동티켓발매기가 있어서 발급받을 수 있다.  단층의 작은 전시장이었지만 다양한 도자기들을 전시해두고 있었다. 한국 도자기들과 유럽도자기들 중심으로 1000점이 넘는 도자기가 전시가 되어있다.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과 백수문학관 사이에 기념비와 사설비 하나가 서 있다. 기념비는 몽향 최석채선생 세계언론자유영웅50인 기념비이고 옆에 서 있는 사설비는 몽향 최석채 선생이 쓴 사설의 내용을 담고 있다. 몽향 최석채 선생은 우리 언론사에 크게 새겨질 정론의 대논객이었고, 직필의 참언론인이었다. 서민의 옹호자, 여론의 목탁, 민주 언론의 기수, 정의 사회 구현의 선봉장이었다. 독재 정부에 저항하다 옥고를 치렀고, 무능 정부의 국정 혼란을 가차없이 경책했으며, 군사정부의 독단과 폭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권력의 감시와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고, 폭력의 협박과 공갈에는 오히려 완강하게 항거했으며, 시종일관 의연하고 당당했다. 대구매일신문 편집국장과 주필,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주필,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의 회장, 대구 매일신문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세론을 대변하고 역사를 증언했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호헌 구국 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등의 사설은 부패 정부와 독재 정권을 예리하고 단호하게 질타, 통매한 정론 중의 정론이었다. 1964년 언론윤리법 철폐투쟁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언론윤리법 철폐를 끝까지 관철시키기도 했다.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의 '세계언론자유영웅 50인'선정은 정론 직필로 일관한 위대한 언론인임을 확인, 평가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타계했으나 그 높은 정신과 큰 업적은 우리의 자긍과 영광이 되어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사설비 내용 : 이즈음에 와서 중,고등학생들의 가두행렬이 매일의 다반사처럼 되어 있다. <중략> 특히 우리가 괴이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학교 당사들의 회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관청의 지시에 의하여 갑자기 행해졌다는 것을 들을 때 고급 행정 관리들의 상부 교제를 위한 도구로 학생들을 이용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입을 벌리면 학생들의 '질'을 개탄하고 학도들의 풍기를 운위하는 지도층이 도리어 학생들을 이용하고 마치 자기네 집안의 종 부려먹듯이 공부 시간도 고려에 넣지 않은 것을 볼 때 상부의 무궤도한 탈선과 그 부당한 지시에 유유낙낙하게 순종하는 무기력한 학교 당국자에 대해 우리들 학부형 입장으로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끝으로 학교 당국자가 인과적인 '상부 지시 순종'의 태도를 버리고 부당한 명령이 있을 때는 결속해서 도 당국이나 교육구청에 그 비를 건의할 수 있는 노력과 학도 애린의 성의를 보여 달라는 것을 부탁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자' 중에서 - (1955년 자유당 정권 시절)





 백수문학관

홈페이지 :  http://baegsu.gc.go.kr/

주소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118-18

전화번호 :  054-436-6834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휴관일    :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당일

관람료    :  무료




 백수문학관은 백수 정완영 시조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다. 지난 2008년 이례적으로 생존 문인임에도 문학관이 세워졌다. 백수 정완영 시인은 1919년 김천 출생으로 1918년생인 황금찬 시인 다음으로 한국 시단에서 나이가 많다. 지난 40년과 꾸준히 시조를 써왔다고 한다. 한 분야의 대가를 이룬 사람들에게서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문학관 앞의 거대한 연필 모형들이 인상적이다. 내부에는 전시실과 함께 세미나실이 있는데 마침 어떤 행사가 열리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찰칵대는 소리보다는 조용히 처음 만나는 정완영 시인의 시를 조용히 읽어본다.


조국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 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