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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김해 여행] 인도에서 온 소녀가 가야의 왕비 되어 잠든 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은 수로왕릉에서 800미터정도 떨어져있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위치상 조금 외진 곳에 있어서인지 수로왕릉이 사람들로 붐비는 반면 수로왕비릉 꽤 한적했다.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변에 구산동 고분군이라 불리는 작은 규모의 릉이 몇 개 더 있다. 수로왕릉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정비되었다. 5미터의 높이에 약 17미터 규모로 호석이 없다. 수로왕비릉 뒷편으로는 낮은 돌담이 있고 그 뒤로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앞으로는 낮은 단이 만들어져 있다. 경내에는 숭보재, 외삼문, 홍살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석탑이 있다. 양지 바른 곳에 릉이 자리잡고 있어 날 좋은 날에는 눈 부시다.





개방시간   :  동절기(11월~2월) 9시 ~ 18시

                  하절기(3월 ~10월) 8시 ~ 19시 (4~9월은 20시까지)

관람 요금  : 무료

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20

전화번호   : 055-330-3948





김수로왕과 수로왕비 허황옥에 관한 전설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왕비를 맞이할 것을 주청하는데 알에서 깨었다고 알려진 수로왕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이 하늘의 뜻이듯이 왕비도 하늘이 점지해 줄 것이라고 일축한다. 그 때 붉은 돛을 단 배가 해안에 닿았고 허황옥이 배에서 내렸다. 많은 신하들과 금은보화와 함께 가야에 당도한 그녀는 부모님의 꿈에 자신이 가락국 수로왕의 배필이 되어야된다고 해서 바다를 건너 오게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김수로와 허황옥은 부부가 된다. 이 부부는 9명의 남자 아이를 낳는데 7명은 수로왕의 성을 물려 받아 김해 김씨가 되고 2명은 허황옥의 성을 물려 받아 김해 허씨가 되었다고 한다. 






 능비에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라고 새겨져 있다. 보주태후는 수로왕비 허황옥을 부르는 말이다. 보주는 중국의 지역명으로 허왕옥이 중국의 보주를 거쳐와서 그리 불렸다고 한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이야기는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호기심을 극대화시키는 면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점에 있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굳이 수로왕이 인도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까운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를 두고 왜 인도였냐는 것이다. 어찌되었던 인도에 있는 허황옥이 인도의 아요디야라는 도시를 지배하는 군주의 딸이었다는 해석이 대세인데다가 몇년전에는 아요디야에 기념물을 세우기까지 하고 교류를 시작하기도 했다. 인도여만 이 스토리는 더 멋지다. ㅎ 중국 같은 주변국과의 정략결혼은 우리 역사에서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가의 일이어도 2천년전의 일을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수로왕비릉에는 흥미로운 유적이 있다. 바로 파사석탑(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27호)이다. 이 석탑은 수로왕비가 가락국에 올 때 배에 실어 가지고 왔다고 전해진다. 처음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오려고 했을 때 파도가 심해 다시 돌아가 이 파사석탑을 싣고 다시 출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파도를 진정시켜준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일명 진풍탑으로 불리운다.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신농본초라는 책에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다. 닭 벼슬 피를 돌 위에 떨어뜨리면 피가 굳지 않는다고 한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이라고 한다. 원래 호계사에 있었으나 1873년에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다시 이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