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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수성구 여행] 대구 수성구에서 노~올자!!!




 대구 수성구 떠나는 여행은 기차와 버스 무엇을 이용해도 쉽게 시작할 수 있다. 영남제일관 근처에 동대구역과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이 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로 꼽히는 인구 50만명의 수성구! 하룻동안 수성구에서 논다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 꼭 들려봐야 할 곳으로는 영남제일관, 대구시립미술관, 국립대구박물관, 수성못 이렇게 4곳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자마다 여행 스타일이 다르니 여기에 취향대로 가감을 하면 될 것이다. 걷는 것을 좋아한다면 수성구 문화유적 둘레길을 추가하면 되고 공연을 좋아하면 수성아트피아에서 공연을 볼 수 있다. 아래 여행코스는 꽤 교육적인(!) 루트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인 장소가 많기 때문이다. 데이트 코스라면 미술관, 수성아트피아, 수성못 이렇게 3곳을 압축해서 가고 수성못 근처에서 근사한 저녁이나 점심을 먹으면 하루가 후딱간다. 


 대구 수성구 여행코스

영남제일관(+고모령비, 대구부 수성비, 영영축성비) -> 독무재 / 하효자 정려각 -> 모명재 -> 고모역 -> 구천지 -> 사월동 지석묘군 -> 노변동 사직단 -> 대구스타디움 -> 대구시립미술관 -> 국립대구박물관 -> 수성아트피아 -> 수성못



영남제일관




 대구 읍성은 1590년에 처음 만들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임진왜란때 허물어진 뒤 1736년에 돌로 다시 쌓아 석성을 만들었다. 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정문을 두었는데 동문으 진동문, 서문은 달서문, 남문은 영남제일관, 북문은 공북문이라 하였다.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들도 함께 철거되었다. 이 영남제일관은 1980년에 망우공원으로 그 자리를 옮겨 중건한 것으로, 형태는 처음의 모습을 참조하였으나 규모는 원래의 것보다 더 크다.





 영남제일관의 포토존은 단연 병사들 모형 옆이다. 여기서 꼭 사진을 찍자!! 영남제일관이 공원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이 잘 관리되어있어 주변 주민들의 산책과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었다.





 영남제일관에서 거대한 문만을 보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주변에 고모령비, 대구부 수성비, 영영축성비가 있으니 이왕 온 김에 인증샷이라고 찍고 가자. 사실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는 노래가 나이가 많지 않으면 익숙하지 않은 노래일 수 밖에 없는데 노래비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노래가 흘러나오자 주변을 산책하던 어르신들이 따라부른다. ㅋ


 해방 직후 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던 현인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은 그 진원지가 대구직할시 수성구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으로 널리 애창되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은 1948년 현인이 부른 노래로 현인과 함께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 낸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춘의 작품이다. 현인의 음반 작업을 맡은 유호는 가사 독촉에 시달리고 있던 중 우연히 지도책을 꺼내 보다가 대구에 있는 고모라는 지명을 발견하고 어머니와 이별하는 아들을 소재로 [비 내리는 고모령]이란 노래를 만들었다. 이 노래는 가수 현인 특유의 창법으로 대중들의 가슴을 저미면서 대히트를 치게 되었다. 실제 고모령은 형제봉 사이를 넘는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알리는 비석이 제2작전사령부 안에 세워져 있으며 2012년 모명재길이 만들어지면서 고모령 일부 구간을 고모령길로 명명하게 되었다. 한편 망우당공원에 세워진 비석 또한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가 널리 애창 되는 것과 동시에 고모 지역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991년 세워졌으며 고모령 전설과 함께 고모동이 이 노래의 본 고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고모령비 


 대구부 수성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김세호가 경상감영의 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1870년 봄에 수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마쳤는데 원래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워서 동서남북의 성벽 위에 새로이 4개의 누각을 세웠다는 것이다. 누각의 이름은 동쪽 것을 정해루, 서쪽을 주승루, 남쪽을 선은루, 북쪽을 망경루라 하였다. 이 비는 본디 남문 밖에 세워진 것이었으나 1906년 대구부성이 헐리면서 한 곳에 자리잡지 못하다가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겼다. 그런 뒤 1980년 남문을 다시 세우면서 비석도 이 자리로 옮겼다. 비문은 관찰사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절충장군 최석로가 썼다.


 영영축성비는 경상도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였던 민응수가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대구읍성을 쌓은 뒤, 그 규모와 공사 과정을 기록하여 1737년에 세운 것이다. 성의 둘레는 총 2124보, 성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에게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한 담인 여첩이 819첩, 성 높이는 서남이 18척, 남북이 17척, 뒤축대의 넓이가 7보, 높이가 3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읍성은 원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때 비로소 돌로 쌓아 석성으로 만들었다 한다. 비문은 민응수가 짓고 글씨는 백상휘가 썼다.



▼ 대구부 수성비(좌), 영영축성비(우)


 영남제일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하효자 정려각과 독무재가 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니 눈도장이라도 찍고 가길. 하효자 정려각(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8호,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389-9) 안에 있는 비석은 대구 경북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비 중의 하나이다. 고려 때 이부시랑을 지낸 하광신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327년 조정에서 정문을 세운 것이다.정려각은 처음에 달성 하씨의 종산인 수도산 부근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이 정려비는 1781년 만촌동 형제봉 기슭에 중건한 것을 일본 강점기 때 이곳으로 다시 옮긴 것이다.


▼ 하효자 정려각


 독무재(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188-1)는 고향 마을에 은거하며 후진을 길러낸 선비 하시찬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제자들과 유림에서 지은 재실이다. 하시찬은 일찍이 당대의 석학이던 이경호와 송성담에게 학업을 닦은 후, 그가 태어난 곳인 효목동에 독무암서라는 재실을 지어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독무재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와 유림에서 독무암서가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이다. 1968년 도로건설로 당시의 건물이 헐리게 되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이 때 독무재의 왼쪽에 사당인 경덕사와 장판각을 새로 지었다. 독무재는 중앙에 강당을 두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대칭으로 배치하였으며 기둥 위쪽에는 이익공으로 장식하였다.


▼ 독무재



모명재



 두사충이라는 인물은 꽤 흥미로운 인물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린 인물인데 대구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그와 관련된 지명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현재의 모명재는 두사충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912년에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는 네모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앞쪽에 모명재가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이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고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툇마루를 두었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 역시 '백천유수필지동'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이 지어 보냈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는 대청기둥, 충무공의 7대손인 삼남수군통제사 이인수가 비문을 지은 신도비와 명나라에서 가져온 청석으로 다음은 2점의 동물조각상이 있다. 뒷산 형제봉 기슭으로 두사충의 묘소가 있다.


▼ 모명재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는 원군을 이끌 장군으로 이여송 장군을 임명했다. 그의 일급참모이자 풍수전략가인 두사충 역시 조선으로 향했다. 1593년 조선의 관군과 의병, 이여송과 두사충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은 왜군을 격파하며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도 잠시, 벽제관(고양시) 전투에서 왜군에 대패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만다. 패전의 모든 책임이 진지의 위치를 잡는 임무를 맡은 두사충에게 돌아갔고 두사충을 참수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참패의 원인이 진지의 위치가 아니라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다는 우의정 정탁 등 조선 대신들의 구명운동으로 두사충은 간신히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참수를 면하게 되자 두사충은 새로운 삶을 산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조선에서 두번째 삶을 살게 된 것이리라.


두한필의 묘


 두사충은 대구에 자리를 잡고 수십년을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대덕산(앞산)을 올랐다. 산에 올라 고향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그리움이 한없이 메아리치자 두사충은 아예 대덕산 밑으로 집을 옮겨와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 붙이고 제단을 쌓아 매달 초하루 관복을 입고 명나라 황제가 살던 북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다. 또한 호를 '명을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모명'으로 바꾸었다. 두사충이 배례를 올렸던 대덕산 일대는 현재까지 '대명동'이라 불리며 대명동은 11동까지 있는 대구에서 면적이 가장 큰 동이 되었다. 평생 풍수를 연구한 두사충의 안목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답게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풍수이론을 갈고 다듬은 '모명유결'이란 풍수서를 펴냈다. 지금도 이 책은 풍수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두사충의 묘


어느덧 죽음을 예감한 두사충,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묘터를 스스로 점지해둔 터였다. 그가 미리 보아둔 대구 최고의 명당은 어디였을까? 그러나 자신이 누울 자리를 찾아서 형제봉 앞을 지나던 중 그만 숨을 거두게 된다. 그 바람에 두사충이 묻히고자 했던 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그 자리가 지금의 고산지역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묘는 모명재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후손이 두릉두씨 역시 지금까지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두사충의 무덤 근처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있다.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동안 피고 지어 백일홍이라고도 불리며 꽃말은 '떠나는 벗을 그리워하다'로 묘지에 잘 어울리는 나무다. 또한 나무껍질이 얇아 속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삿된 생각을 하지 않고 청렴하게 살겠다는 선비들이 삶의 자세를 상징한다하여 향교나 서원에 많이 심기도 했다. 중국이 원산지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은 이 땅의 흙이 되었지만 중국에 뿌리를 둔 배롱나무가 그를 한껏 끌어안으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다.


▼ 두사충의 묘


모명재 근처에 명정각이라는 작은 정려각이 있다.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1823~1893)의 효행을 알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정려를 내린 것이다. 두한필의 묘가 두사충 묘와 20미터정도 떨어져서 자리하고 있다. 두한필의 효행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 추운 겨울날,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몸져누운 어머니를 간호하는데 여념이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송이버섯죽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엄동설한에 송이버섯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들은 차마 어머니께 버섯이 없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을 뒷산에 올랐다. 나무 밑을 샅샅이 뒤져가며 버섯을 찾기 시작했다. 아들의 정성에 하늘이 감복하였는지 눈 덮인 큰 소나무 밑에서 버섯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들은 버섯을 품안에 넣고 한 걸음에 달려가 어머니께 버섯죽을 끓여드렸다. 그 후 어머니는 점차 원기를 회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이다. 모명재 서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담한 효자각이 바로 명정각으로 두한필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내린 정려(충신,효자,열녀 등이 사는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이다. 두한필이 세상을 떠난 후 조정에서는 이 같은 정려와 함께 종3품에 해당하는 '통훈대부 규장각직각'이란 벼슬을 증직(충신,효자,학식이 높은 사람 등에게 죽은 뒤에 품계,관명 등을 높여주는 일)하고 그의 효행을 기렸다.



▼ 명정각



 수성구에는 걷기 좋은 길이 참 많다. 모명재길도 그 중 하나다. 모명재에서 시작해서 형봉, 제봉을 지나 영남제일관까지 3.39km에 이르는 길이 1코스로 형제봉길이다. 1코스를 걷는 사이에 2코스 모봉길, 3코스 고모길, 4-2코스 팔현길로 향하는 갈림길이 놓여있어서 선호하는 길로 걸으면 된다.





고모역


 고모역은 1925년 11월 1일 간이역으로 시작하여 2006년 11월 1일 문을 닫은 역사가 깊은 역이다. 고모역 앞에는 시비가 서 있다. 고모역 건물은 붉은 벽돌로 사면에 벽을 세우고 푸른 기와로 지붕을 덮은 단층 건물로 번잡하지고 거창하지도 않게 자리 잡고 있으며 대합실 여닫이 문, 긴 나무 의자, 매표구 등에서 반백 년 간이역의 역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고모역 길 건너에 시골 슈퍼가 있는데 이 슈퍼 앞에 있는 커피자판기 커피가 참 맛있다. ㅋ


고모역

                                   -박해수 짓고 류영희 쓰다


고모역에 가면 옛날 어머니의 눈물이 모여산다

뒤돌아보면 옛 역은 스러지고 시레기 줄에 얽혀 살던

허기진 시절의 허기진 가족들 아 바르사지고 부서진 옛 기억들

부엉새 소리만 녹슨다

논두렁 사라진 달빛 화물열차는 몸 무거워

달빛까지 함께 실고 쉬어 가던 역이다.


고모역에 가면 어머니의 손재봉틀처럼 

덜커덩 덜커덩거리는 화물열차만 꽁지 빠진 새처럼

검은 물새떼처럼 허기지게 날아가는

그 옛날 고모역 선로 위에서 

아 이즈러진 저 달이 아 이즈러진 저 달이

어머니의 눈물처럼 그렁그렁

옛 달처럼 덩그라니 걸려 있구나 옛 달처럼 덩그라니 걸려 있는

슬픔처럼 비껴 서 있는 그 옛날 고모역에서


▼ 고모역사



  사월동 지석묘군

지석묘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옥수동을 거쳐, 사월동에서 남천과 합류하는 신매천이 만든 부채꼴 지형의 아래쪽에 있다. 이들 무덤은 현재 신매천의 북쪽에 4개가 분포 하고 있는데 옛날부터 칠성바위라 부르고 있어 원래는 7개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고인돌은 비록 무덤이지만 청동기시대부터 사월동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사월동 지석묘군은 독특하게 아파트 단지 안에 자리잡고 있다. 아파트 단지 안에는 없을 거라며 주위를 뱅 둘러보지 말고 곧장 시지2차 보성타운으로 들어가서 찾으면 된다.





 사월동 지석묘군에서 고산서당 가는 길에 구천지라는 호수가 있다. 주변이 잘 정비되어있어서 주변 주민들의 산책 코스로 완전 인기 있는 곳이었다. 근데 고산서당 사진은... 사라졌다!! 고산서당 퇴계 이황 선생과 우복 정경세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사진이 없으므로 패~스. 






노변동 사직단




 사직단은 토지를 주관하는 신인 사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의 다른 명칭으로 [종묘사직]이라고도 한다. 옛 문헌에서도 국가의 안위를 표현할 때는 [사직이 위태롭다]라고 하며, 정부중신을 사직지신이라고 표현하였다. 노변동 사직단은 조선시대 지방 사직단 중의 하나인 옛 경산현의 사직단으로 [경산현읍지] 및 지방지도 등 문헌상으로만 확인되다가 시지택지개발지구의 남쪽 경계를 동서로 지나는 유니버시아드로가 개설되면서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그 모습이 다시 드러나 조선시대 지방 사직단의 구조와 규모 등을 밝힐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사직단과 더불어 발굴된 삼국시대 대규모 고분군인 노변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수백기의 유구와 만 여점의 유물은 삼국시대 고산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렇듯 노변동 사직단은 조선시대 사직단과 삼국시대 고분군이 시대를 달리하여 조성된 복합 유적인 만큼 과거 이 지역의 문화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서, 이러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노변동 사직단과 고분군을 복원, 정비하게 되었다.


▼ 노변동 사직단


노변동 고분군은 인근의 욱수동, 시지동 고분군과 함께 시지지구에 위치한 삼국시대 대규모 고분군으로 삼국시대 덧널무덤 98기, 돌덧널무더 606기, 옹관묘 37기 등 총 741기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토기류 8,800여점과 철기류 1600여점이 출토되었으며 그 외 장신구류 등 모두 만여점이 넘게 출토되었다. 특히 돌덧널무덤 473호에서는 당시 지방의 지배자 신분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금동관 1점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여기 전시되어 있는 고분은 노변동 고분군 돌덧널무덤 427, 428호로 구덩이를 파서 돌덧널을 쌓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쌓은 무덤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현재 전시되어 있는 고분 내부의 유물들은 발굴 당시 출토되었던 유물들의 복제품으로 발굴되었던 상태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 노변동 고분군 유적




대구스타디움


대구광역시 수성구 대흥동 504

053-602-2002




대구스타디움은 대구에서 열리는 큰 경기들이 열리고 쇼핑몰, 영화관이 자리잡고 있어 주민들에게는 좋은 곳이지만 여행자에게는 특별한 장소는 아니다. 단지 뭔가 큰 행사를 한다면 이곳도 여행코스에 넣으면 좋을 것 같다. 특히 미술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고 주변에 공원이 조성되어있어서 산책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대구시립미술관





http://www.daeguartmuseum.org/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7시 (동절기 6시까지)

휴관일 : 매주 월요일

대구광역시 수성구 미술관로 40

053-790-3000

입장료는 전시회마다 다른데 전시회 수준에 비해서 굉장히 저렴한 편이다.





대구미술관은 수성구에서 놀 때 꼭(!) 가야하는 곳이다. 완전 좋다. 연이들이 가기에도 좋고 아이가 있는 가족이 함께 가기에도 참 좋은 곳이다. 기획 전시가 자주 갱신되기 때문에 일년에 몇 번씩 가도 새로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홈페이지를 통해서 어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지 확인 할 수 있다. 내가 제일 재밌게 즐겼던 것은 올해 초에 열렸던 애니마믹 비엔날레 2013-2014였다. 다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좋은 전시회였음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그 후에 열린 다양한 전시회도 좋았는데 지금가지는 이게 제일 좋았다. 그리고 지금 열리고 있는 아트라운지 : 소장품展도 정말 좋은 전시회인 것 같다. 아쉽게도 아직 못 가보고 있지만 말이다.








Bilateral theatre는 서로를 향한 열린 공간이다. 양방향 프로젝트 스크린을 중심으로 펼쳐진 관객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앉는다. 영화를 보기도 하고 반대편 상대방을 바라보기도 한다. 관객들은 상하 좌우 없는 자유로운 배치 속에서 자유롭게 가장 편안한 자세를 잡는다. 이를 위해 화물 적재용으로 쓰이는 재활용 파렛트가 모여서 극장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각 유닛들의 텍토닉적 조합은 극장의 바닥면에서부터 계단과 벤치가 되기도 하고, 등받이와 핸드레일이 되기도 하면서 전체 극장을 공간적으로 부드럽게 에워싼다. 또한 이들의 집합은 빛을 산란하는 스크린으로써, 극장을 더 이상 어둠의 공간이 아닌 아름답게 산란된 빛이 넘치는 열린 공간으로 뒤바꿔준다. 관람객의 동선과 관람의 공간을 고려하여 들어올려지거나 접혀진 지형은 파렛트 유닛으로 픽셀화되어 전시공간을 가득 채우게 된다.



▼ Bilateral theatre




 빈 공간임에도 예뻐서 사진을 찍게 되는 공간이 있었다. 그 어떤 작품이 저 곳에 놓여도 공간 자체가 예뻐서 작품이 빛날 것 같더라. 대구 미술관 완전 애정한다. 대구 여행 갈 때마다 갈 생각이다.






대구국립박물관





http://daegu.museum.go.kr/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

053-768-6051~2

관람시간 : 오전 9시~ 오후 6시(공휴일 오후 7시)

휴관일 : 1월 1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그 다음날)

관람료 : 무료

전시해설 : 오전 10시와 11시, 오후 1시,2시,3시,4시


국립박물관을 몇 번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느 지역을 가든 국립박물관은 굉장히 시설이 잘 되어있고 전시 유물의 퀼리티도 상당하다는 것을 게다가 무료이거나 엄청 저렴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여행을 갔을 때 국립박물관이 있으면 거의 놓치지 않는 편이다. 대구국립박물관도 역시나 좋았다. 사실 언젠가부터 박물관을 미술관의 연장선에서 보기 시작한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유물들... 국보와 보물이라고 불리는 유리관 안의 유물들이 탐난다. ㅋ




 대구 박물관에는 멋진 기획전들도 열리지만 고대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복식실 이렇게 3개의 상설 전시관을 운영한다. 섬유복식실은 독특하게도 우리나라의 복식문화 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것도 함께 전시되어있었다. 오래된 옷들이 많이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로 무덤에서 나오는 출토복식을 꼽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풍습이 있는 지 처음 알았다. 조선시대에는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옷가지로 관 속의 빈틈을 채우는 수례라는 풍습이 있었다. 무덤 속에 넣은 옷의 재질과 수량은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격차를 드러내었고, 옷의 조합은 남녀에 따라 달랐다. 출토복식은 대부분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무덤을 이장할 때 수습된다. 특히 조선시대 전기의 사대부계층은 예법에 따라 회곽에 매장하는 장례방식을 지켰다. 이 회곽은 콘크리트와 같은 성질을 지닌 석회로 관을 밀봉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시신은 자연 미라 상태가 되고 옷가지들도 고스란히 남겨질 수 있었다.




 적의는 대비와 왕비, 세자빈 등 왕실의 여성들이 나라의 중요한 행사에 착용한 최고의 예복이다. 왕과 세자의 면복에 해당하는 옷으로 법복이라고도 한다. 착용자의 신분에 따라 대비는 자색, 왕비는 대홍색, 세자빈은 아청색으로 나뉜다. 대한제국이 성립되고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황후와 황태자비의 대례복으로 심청색 적의를 착용하였다. 이 적의본은 대한제국시기의 적의 옷본이며 꿩 무늬와 조선왕실의 상징인 배꽃무늬가 함께 그려져 있다. 무명 솜장옷(중요민속자료 제229호), 장옷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는 쓰개로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 초,중기까지 여성들의 대표적인 겉옷이었다. 이 장옷은 아청색 무명으로 만든 솜 장옷으로 18세기 이전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안감은 하얀 무명이며, 그 안에 두껍게 솜을 넣었다.


▼ 적의본 재현품(좌), 무명 솜장옷(우)


 먀오족은 중국 남부의 구이저우성, 윈난성, 후난성, 쓰촨성, 광시성을 비롯하여 베트남, 라오스, 태국의 북부지역에 산다. 넓은 지역에 많은 인구가 거주하므로 각각의 문화도 다양하다. 특히 구이저우성의 묘족은 소뿔모양의 머리장식, 목걸이, 귀걸이 등 화려한 은제 장신구와 자수로 유명하다. 먀오족은 딸이 태어나면 은장신구들을 준비하는데, 딸의 무병방수를 바라는 마음뿐만 아니라 집안의 부와 권위를 상징한다. 우치카케는 일본 에도시대까지 무가와 귀족의 여성용 의례복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전통혼례식에서 신부의 예복으로 주로 쓰인다. 소매는 길게 늘어지며, 밑단은 솜을 두툼히 넣어 바닥에 자연스럽게 끌리도록 하였다. 화려한 무늬의 비단에 다채로운 무늬를 금은사로 수놓아 꾸몄다. 일본의 전통 바지인 하카나는 바지통이 치마처럼 넓은 것이 특징이다. 허리의 앞과 뒤가 옆선에서 분리되어있다.



▼ 우치카케/남아용 하카마/오비(좌) 먀오족 여성의 복식과 보석(가운데와 오른쪽)


 부처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줄임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관에 화불이 있고 정병을 든 모습으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중국 원나라 라마 불상 양식의 영향으로 화려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제작되었다.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로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은 성자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나한신앙이 성행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전통은 지속되었다. 조각상으로는 10대 제자상과 10나한, 500나한 등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 왼쪽부터 부처, 관음보살(국보 184호)나한상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갖춤(보물 325호. 칠곡 송림사. 통일신라 8세기), 1959년 송림사 오층전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탑신의 거북모양 석함 안에서 사리기와 여러 공양물이, 5층 옥개석 윗면에서는 고려 상감청자함이 발견되었다. 화려한 전각모양 사리기 안에 녹색유리 사리병과 잔을 안치하였다. 금판을 오려 만든 신라 고유의 금속공예기술과 서역에서 유입된 유리제작 기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용머리(보물 1410호. 영주 풍기. 통일신라 9세기), 절 입구에서 사찰의 소속을 표시하거나 법회 때 깃발을 거는 시설인 보당 끝을 장식하던 용머리다. 용이 입에 물고 있는 여의주 뒤로 줄을 거는 도르래가 있어 깃발을 쉽게 올리고 내릴 수 있게 고안되었다. 이 용머리 장식은 20미터 정도의 높이로 올려져 금빛을 내며 깃발을 휫날리는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갖춤(좌), 용머리(우)


 회청색 경질토기의 등장과 신라, 가야토기로의 변화를 수 많은 토기와 함께 자세한 설명으로 알려준다. 굴가마에서 1000도 이상으로 구워내었기에 회청색을 띠며 매우 단단하여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는 질그릇을 경질토기라고 하며, 도질토기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영남지방에서는 3세기 말에 처음 등장하는데, 제작 기술의 확보가 외부의 영향과 스스로의 진보라는 두 가지 견해로 나뉜다. 이보다 앞서 굴가마를 이용한 회색 연질토기인 와질토기가 서기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유행하였는데, 회청색 경질토기의 형태는 대부분 와질 토기를 계승한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기술적 발전을 통해 생산된 것으로 볼 여지가 많다. 영남지방의 회청색 경질토기는 처음 등장하였을 때 지역별로 차이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후 4세기 중반을 거치며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김해지역만 고유한 특색을 나타내었을 뿐이다. 하지만 고대국가의 기틀이 분명해지고 신라와 가야의 고유한 정치색이 나타나면서 회청색 경질토기는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로 분화되었다. 특히 가야토기는 5세기 이후 일본열도에 전해져 스에키 발생에 기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안릉신영도는 1786년에 요산헌의 부친이 황해도 안릉의 신임현감으로 부임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지방관 부임을 축하하는 거대한 행렬과 관아의 풍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 가야와 신라의 토기(좌상), 안릉신영도(좌하) 



특별전과 기획전은 가끔 유료 입장일 때가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분청사기전이 특별전으로 열리고 있었다. 백자와 청자만 멋진 줄 알았는데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 15~16세기 넝쿨무늬 병과 물고기무늬 병(상), 넝쿨무늬 항아리(하)



 국립대구박물관을 나와 광장의 한쪽 끝으로 가면 문이 달린 작은 봉분이 하나 보인다. 6세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돌방무덤으로 달서 설화리고분군에 있던 것이다. 달성 설화리고분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556-5번지의 구릉에 위치한다. (재)영남문화재연구원이 건물신축에 앞서 2012년 3월 19일부터 9월 4일까지 발굴하였고, 그 결과 청동기시대의 돌널무덤 1기와 삼국시대의 덧널무덤 1기, 돌덧널무덤 15기, 독무덤 1기, 돌방무덤 16기를 조사하였다. 이에 문화재위원회는 2012년 10월 26일에 온전하게 남은 1호 돌방무덤의 이전을 결정하였다. 1호 돌방무덤은 널방, 널길, 호석, 봉분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은 깬 돌로 벽을 쌓고 큰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으며, 서쪽에 출입구인 널길을 두었다. 널방에서는 귀걸이, 쇠도끼, 미늘쇠, 쇠칼이 출토되었고, 봉분 안에서는 뚜껑달린 굽다리접시가 여러 개 확인되었다.


▼ 달성 설화리 돌방무덤



수성 아트피아




http://www.ssartpia.kr/

대구광역시 수성구 무학로 180

053-668-1800


다양한 공연과 미술 전시를 볼 수 있는 곳이다. 11월 말에는 [벽 속의 요정]을 공연한다. 몇년전 예술의 전당 소극장에서 봤었는데 또 봐도 좋을 것 같다. 수성못이 근처 있고 부근에 맛있는 레스토랑도 많아서 이곳에서 공연을 보고 수성못 근처 산책, 야경 구경하기, 맛집에서 저녁으로 데이트 코스를 짜도 좋을 곳이다.





수성못






수성못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인물이 있다. 미즈사키 린따로다. 그가 수성못을 만들었다! 그의 무덤이 수성못 인근에 자리하고 있고 그 앞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와있다. 이 무덤은 1915년 일본에서 건너와 수성못을 축조하고 관리한 수기임태랑선생의 무덤이다. 기후현 기후정장을 지낸 뒤 개척농민으로 대구에 와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당시 수성벌이 한발과 홍수로 많은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조선총독을 직접 면담해 1만 2천엔(현재 10억엔 상당)의 공사비를 지원받아 10년간의 공사 끝에 수성못을 완공하였다. 그는 1939년까지 수성못을 관리하다가 임종을 맞이했는데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한국식 무덤으로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수성못은 낮이나 밤이나 언제나 걷기 좋은 산책로이자 데이트코스다. 주변에 카페와 레스토랑도 많아서 사람들로 북적거릴 때가 많다.





수성못 한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가 놓여있다. 왜 생뚱맞게 이 곳에 이상화 시인의 시비가 있을까 싶겠지만 수성 들판이 이 시의 지리적 배경이기 때문에 이 시비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빼앗긴 들이 수성들판인가보다.





수성못은 밤이 되면 더 화려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수성구에서 야경을 즐기기 가장 좋은 곳이 수성못이지 않을까 싶다. 수성못을 내려다보면 야경을 찍고 싶다면 바로 뒤에 있는 산인 법이산에 오르면 된다. 나도 법이산에 오르려고 열심히 올라갔는데... 어느새 앞산 전망대에 도착해 있었다? -_-a ㅋ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잘 보고 오르도록 하자.





수성못 옆에는 도심 속 테마파크를 표방하는 아르떼 수성랜드(http://www.suseongland.co.kr)가 자리하고 있다. 반짝이는 회전목마라니.... 감성 돋는구나 ㅋ 이렇게 알찬 대구 수성구 여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