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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영화처럼

코쿠리코 언덕에서 - 남아있는 감성과 잃어버린 이야기

코쿠리코 언덕에서

 

 남아 있는 감성과 잃어버린 이야기의 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 쉽게 손이 가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큰 기대는 충족되기 쉽지 않다. 물론 여전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성은 좋다. 60년대 일본 모습에 향수에 젖는 것는 것은 결코 60년대 일본에서 살아온 사람만이 아니다. 향수도 학습인지 80년대에 태어났고 일본에서 살지 않음에도 아련함이 느껴진다. 음악과 작은 디테일들 다양한 공간들이 가지는 의미와 모습도 좋았다. 하지만 이야기 자체의 힘이 너무 없다. 아니 실망하게 되는 이야기다. 사랑하게된 고교생 선후배 사이인 우미와 슌이 배다른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갈등하다가 결국 남매가 아닌 남남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줄거리를 들으면 정말 별로이지 않은가. 그나마 이 이야기를 끝까지 보게 하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성 때문이다.

 우미가 슌을 만난 후 집으로 돌아와 깃발을 올리며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슌이 뛰어내리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슌이 우미의 가슴으로 뛰어든 것이다. 우미와 슌의 관계 뿐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작은 설렘과 기쁨을 드러내는 두세줄의 붉은 빗금이 좋다. 오래된 동아리 건물인 카르티에라탱이 좋다. 60년대의 일본의 골목, 곤로를 사용하는 부엌의 모습도 정감있다. 큰 줄기의 이야기를 빼면 나머지는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성 그대로다. 그래서 안타까운거다. 사실 이야기가 제일 중요하지 않은가.

 한국전쟁에 물자수송선으로 참여했다가 우미의 아버지는 죽는다. 이야기의 배경은 64년의 동경올림픽이 열리는 시기다. 전쟁의 패배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20년도 되지 않아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만큼의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희생자인 척은 하지 마시길.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우리나라 군인들을 희생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모욕인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차라리 카르티에라탱에 모든 이야기의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 이미 존재하는 열정에 신비한 무언가를 결합하는 편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자기복제라 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이 우리가 미야자키하야오의 작품에서 기대하는 것이기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카르티에라탱은 프랑스 학문의 거리다. 중세부터 이어져왔기에 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면이 모두 함축되어있는 이미지로 <코쿠리코 언덕에서>에서 보여지는 동아리 건물의 모습과 잘 부합된다. 과거의 고등학생과 지금의 고등학생은 많이 달라 보인다. 그들은 대학생들 같다.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현하고 권리를 주장한다. 이런 것 또한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향수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이 영화에 가장 적합한 관객은 그 시대를 살아온 일본의 중년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