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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의 감동적인 열정적 삶

김득신

 

 김득신의 감동적인 열정적

 

 

 조선 최고의 독서광이자 공부벌레였던 김득신을 하시나요? 김득신의 삶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뛰어난 천재로 놀라운 일들을 성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김득신은 어려서부터 아둔해서 둔재소리를 들으면서 컸습니다. 그런 김득신을 우리는 지금 17세기 최고의 시인 중 하나로 꼽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김득신은 김시민 장군의 손자이자 김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대부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0세가 되어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글머리가 없어서 주위에서는 그의 아비인 김치에게 아들에게 글공부를 시키는 것은 그만두라고, 희망을 가지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김치는 김득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스물살이 되어서야 스스로 글을 지을 수 있었지만 김치는 글을 배우는 것은 과거급제를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공부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최고의 독서광으로 불리는 것은 그가 많은 책을 읽기 때문이 아닙니다. 한 권의 책을 수만번씩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백이전>은 1억 1만 3천번을 읽었고 한유의 <사설>은 13,000번, <악어문>은 14,000번, <노자전>은 20,000번, <능허대기>는 25,000번을 읽었습니다. 김득신이 이렇게 엄청나게 반복해서 책을 읽었음에도 아둔한 머리 때문에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에피소드 1.  김득신은 어느날 하인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글 읽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글의 내용이 참으로 귀에 익숙했습니다. 그는 하인에게 말합니다.

 

이 글의 내용이 참으로 익숙한데 도대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나리,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이 글의 내용은 주인님이 수 없이 읽으셔서 저도 알고 있습니다요.

 

그 글은 김득신이 그 동안 11만번을 읽었던 <백이전>이었습니다. 그의 하인은 문 밖에서 그가 읽는 글을 11만번 들었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의 모든 하인과 여인들도 수만번씩 여러책들을 들었기 때문에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김득신은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했던 것입니다. 분명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그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이전을 1억번이나 읽게 되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에피소드 2. 정자에서 친구들과 시 구절을 짓는 자리를 가지게 된 김득신.

이 보게들. 내가 오늘 정말 좋은 시 구절을 써 보았네. 들어보게나. 삼산은 푸른 하늘~.

득신이 이 사람아. 그 시 구절은 이백의 <봉황>에 나오는 구절이 아닌가.

이런 에피소드들은 이미 김득신이 여러 책을 수 만번씩 읽은 후 였습니다. 이 쯤되면 보통 사람들은 포기했을 겁니다. 나는 공부와 맞지 않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죠.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서 평생 일하지 않아도 굶을 일도 없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사대부 집안의 자식이 글공부말고 또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합니다. 김득신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책을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고는 독수기라는 1만번 이상 읽은 책의 목록과 책에 대한 평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 독수기에는 총 36권 목록이 실려있습니다. 그가 늙으막에 괴산에 지은 취묵당이라는 정자에는 독수기가 편액으로 걸려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독서습관으로 인해서 그의 서재는 억만재로 불리었습니다. 즉, 만번을 넘지 않으면 글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데서 붙여진 것입니다.

 

 에피소드 3. 김득신은 여든하나에 죽었습니다. 당시 시대로는 장수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딸과 아내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딸의 장례행렬을 따라가면서 그는 책을 들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장례행렬을 따라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는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이 곡을 하는 와중에 한 구석에 자리하고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아... 이쯤이면 열정을 넘어선 병이고 강박관념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가 가여워지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평생 책을 읽던 그는 예순이 되기 한 해전인 59세에 과거에 급제합니다. 보통 당시 선비들이 30세 이전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과거공부를 그만 두는 것과는 굉장히 상반된 일이었죠. 여러 관직을 조금씩 거치고 취묵당을 지어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던 중 1684년 여든하나가 되던 해에 화적에게 살해당해 죽었습니다. 그의 묘비는 그가 살아있을 때 미리 스스로 작성해 둔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재주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스스에게 한계를 두지 말아야 한다.

나처럼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는데 결국에는 나도 이루었다.

모든 것은 힘쓰고 노력하는 데 달려 있다.

 

 

 김득신의 무덤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