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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퀴리 부인의 사랑, 아모르 빈치트 옴니아

마리 퀴리 부인

 

 마리 퀴리 부인의 사랑, 아모르 빈치트 옴니아

 

마리 퀴리 부인은 라듐을 발견해서 노벨상을 2번이나 받은 것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마리 퀴리 부인이 아모르 빈치트 옴니아, 즉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만들거라는 이야기를
하며 노벨상 따위(!)보다 사랑을 중시했다는 사실은 위인전에 나와있지 않죠.
마리 퀴리 부인은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이민 온 이주민으로 1895년 결혼 피에르 퀴르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 후 10년이 지난 1906년 4월 19일 마차에 깔려 급사했습니다.
그 후에도 여전히 연구에 몰두했는데 그러다 남편 피에르 퀴르의 제자인 폴 랑주뱅과 사랑에 빠집니다. 문제는 폴 랑주뱅은 유부남이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기 전 마리 퀴리 부인은 남편과 함께 연구로 1903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1911년에는 남편이 죽은 후 혼자만의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때 퀴리 부인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랑주뱅의 아내가 자신의 남편과 마리 퀴리가 불륜 관계라고 언론에 폭로를 합니다.
여론은 마리 퀴리 부인이 부도덕하다고 비난하고 나섰고 노벨상을 수여하는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노벨상을 취소해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까지 이릅니다.
과학적 업적으로 받은 상을 불륜이라는 이유로 취소하는 것도 우스운 거죠.
그런데 이런 논의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과학계의 보수성 때문입니다.


 

 

 

마리 퀴리 부인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고, 프랑스인이 아닌 이민자였던 것입니다.
이 두가지 요소가 그녀에 대한 여론과 과학자들의 비난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엄청난 비난에 시달림에도 마리 퀴리 부인은 랑주뱅과의 사랑에 집착했습니다.
노벨상이 취소되더라도 랑주뱅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아모르 빈치트 옴니아, 사랑이 모든 시련을 극복해 줄 거라고 믿었던 거겠죠.
노벨상 그까이꺼 집에 하나있는데 뭐 라고 생각했는지도... ㅋㅋ

 

 


하여간 이런 마리 퀴리 부인과는 달리 세상의 관심과 비난에 당황한 랑주뱅은 결국 아내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마리 퀴리 부인은 자살시도까지 하게되고 건강도 급속히 나빠집니다. 
마음을 다 잡은 그녀는 연구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그녀를 죽음으로 치닫게 합니다.
방사능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1934년 7월 4일 마리 퀴리 부인은 백혈명으로 사망합니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라는 유럽의 변방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어렵게 이민을 온 그녀.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연구해서 노벨상을 받은 퀴리 부인. 그리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두 번의 사랑을 한 그녀.
마리 퀴리 부인처럼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자,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 마리 퀴리의 손녀 엘렌 졸리오와 랑주뱅의 손자 미셸 랑주뱅이 결혼했다는 거!!!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들이 이루었네요. 신기하네요.

 

마리 퀴리 부인의 일대기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