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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차이나 여행기

중국 서안 병마용갱의 하이라이트, 병마용갱 1호갱


 2편의 병마용갱 포스팅과 한편의 진시황릉 포스팅을 했는데도 하나의 병마용갱 포스팅을 더 하려고 한다. 이 포스팅에서 다룰 병마용갱 1호갱이 사실 병마용갱을 대표하는 곳이다. 가장 큰 공간에 가장 많은 병마용이 줄 서 있는 곳이 1호갱이기 때문이다. 1호갱이라는 이름 또한 가장 먼저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한 사람들은 이 1호갱만 보고 가기도 한다. 외국의 정상들도 서안에 오면 이곳은 보고 갈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1974년 농부들이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려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는 병마용갱. 처음에는 땅 속에서 나오는 토기인형들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곳이 가마터거나 절터여서 이런 것들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도자기도 아니고 금은보화도 아닌 흙으로 만든 토기는 돈이 되지 않으니 골동품이라는 인식도 없었다. 이런 것들이 계속 나오자 동네 아이들이 이 도용의 머리를 가져가서 돌기 시작했다. 부서진 토기 인형을 결합해서 허수아비로 사용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은 국가적 보물은 물론 전세계인들을 중국 서안으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는 병마용갱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의 작은 호기심과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다. 바닥에 깔린 벽돌을 꺼내서 베개로 사용하거나 벽돌이 필요한 곳에 사용했다. 청동 화살촉이 나오자 고물상에 가서 kg당 팔아치우기도 했다.



수 많은 병마용 쏟아져나오면서 결국 그 소문은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기자에 의해 전국으로 퍼졌다. 정부에 의해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2주가 넘도록 그 규모가 파악되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들을 투입해서 뤄양삽으로 용갱의 가장자리를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뤄양삽은 고대 도굴꾼들이 발명한 것으로 이 삽은 무덤을 파헤칠 필요가 없이 땅에 조그만 구멍을 내고 찔러 넣어 삽이 딸려 나온 토층과 기타 물질들을 통해 지하에 무엇이 매장되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도구였다. 10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도 뤄양삽에는 계속 이곳이 용갱이라고 나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뤄양삽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생긴 일이 전해져내려온다. 이 때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용갱의 가장자리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1년 후 용갱 전체가 파헤쳐졌고 그 노인이 알려준 가장자리가 정확했다고 한다. 근데 이게 무슨 2천년 전 전설도 아니고 몇십년전 발굴현장인데 이런 전설같은 일이 내려오는 게 우습기도 하다. 아마도 거대한 유적을 발굴함에 있어 발굴과정도 뭔가 신비롭기를 바랬나보다.



1호갱은 높은 천장에 자연채광으로 병마용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날이 밝을 때 와야한다. 비가 오거나 어두울 때면 보기 불편할 것 같다. 앞쪽으로 수 많은 병마용들이 줄지어 있고 뒤로 갈 수록 드물어지는 형태다. 병마용군단들 사이에는 벽이 서 있다.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뒤에서는 아직도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0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발굴과 복원을 해야하는 곳. 그곳이 진시황제가 남긴 것이다. 2천년전 사람들은 이것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당했을텐데 우리는 그것을 보고 감탄을 한다. 인도의 타지마할도 마찬가지고...   




실제로 보면 '와'라는 감탄사 말고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가이드가 없으면 영문으로 된 간단한 설명들밖에 볼 수가 없다. 국내에도 진시황제와 그의 무덤, 병마용갱에 대한 책이 여러권 나와 있기 때문에 한, 두권 읽고 간다면 더 흥미롭고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