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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박제된 백제의 조각을 볼 수 있는 국립공주박물관

공주는 백제의 수도였기에 많은 백제 문화제가 남아있다. 무령왕릉의 뒷길로 야트막한 동산을 넘으면 국립공주박물관의 야외전시장으로 이어진다. 박물관에는 공주 뿐 아니라 대전과 충남지역에서 발견한 3만점의 문화재가 보관되어있다. 이 중 국보 18점, 보물 4점이 있다. 전시장은 크게 야외전시장, 1층의 무령왕릉실, 2층의 충청남도의 고대문화실로 나뉘어진다. 아무래도 2층 전시실은 이 지역의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워낙 다양한 시대를 망라해서 전시되어있기에 무령왕릉 전시실보다 매력이 떨어진다. 무령왕릉실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약 4600개 유물의 일부가 전시되어있는데 구체적인 설명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시물들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국립공주박물관의 입장료는 무료인데 티켓을 발부받아야한다. 티켓에 그려진 진묘수가  이 곳을 대표하는 전시물임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이미 발견되어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던 송산리 6호 무덤의 배수로 공사 중 발견되었다. 이 무덤에는 무덤의 주인이 백제의 25대 왕인 무령왕임을 알려주는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은 현재 보존을 위해서 영구폐쇄 상태다. 국사책에서 많이 보아왔기에 나는 천마총처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줄 알았다. 무령왕릉 앞의 굳게 닫힌 철문을 보고 꽤 허무했다. 이 무덤에서 4687점의 부장품이 나왔는데 17점이 그 가치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 계통의 벽돌무덤으로 중국 도자기도 무덤에서 함께 출토되었다. 이것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는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진묘수다.



진묘수는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이다. 이 풍습 또한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초나라에서 나무로 만든 사슴뿔 달린 기괴한 진묘수를 무덤에 부장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그 역할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죽은 자를 지키는 역할이었다. 이것이 점차 지역적 형태적으로 확산, 변이되어가면서 머리에 하나의 예리한 뿔이 달린 동물로 정리되어 갔다. 형태는 다양해서 무령왕릉에 있는 것처럼 조각품인 경우도 있지만 벽화나 벽돌의 그림인 경우도 있다.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서는 무덤 앞에 큰 진묘수 한쌍을 무덤 앞에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경우 무덤 내부에 넣어 두는 것에 비해서 도굴의 위험이 크지 않았을까? 여기 금은보화가 묻힌 황제의 무덤이 있다고 광고하는 것이잖아. 물론 그 왕조가 유지되는 동안은 경계를 하겠지만 서민의 삶이 녹록치 않으니 그것이 언제까지 보존될 수 있을 거라는 보장할 수 없다. 반면 무령왕릉에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무도 그곳이 무덤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 황제릉 앞의 커다란 진묘수 한쌍보다 무령왕릉의 작은 진묘수가 그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이 녀석보다 더 효험 좋은 진묘수를 가진 무덤은 아직도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왕의 안식을 지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을 지키는 것을 임무로 하던 진묘수는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영혼의 승선을 도와주는 안내자의 역할을 겸하게 된다. 즉 도교적 저승세계에 대한 인식의 표현인 셈이다.



무령왕릉에는 무령왕의 관과 왕비의 것이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무령왕은 62세되던 523년 사망한 후 2년 후에 이 무덤에 묻혔다. 왕비는 526년, 32세에 요절한 후 3년 뒤에 합장되었다. 합장 되기 전 2~3년 동안 정지산에 왕과 왕비는 각각 모셔져서 국내외 방문객을 맞았다고 한다. 일부 공산국가의 지도자 시신을 방부처리해서 관람객을 받았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거 같다. 당시에는 시신의 부패를 막기위해 얼음을 사용했다고 한다. 왕과 왕비의 관은 금송으로 만들어진 나무관이며 외부에 운반을 위한 고리가 붙어있다.


 


아치형의 무덤은 벽돌로 이루어졌는데 등잔을 놓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령왕릉이 발견되던 당시 도굴되지 않은 백제 왕릉에 전국이 흥분했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빨리 유물들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이틀만에 그 많은 유물을 꺼냈고 기자들은 사진을 찍겠다고 들이닥쳤다고 한다. 그 와중에 손상된 유물도 꽤 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이 유물을 보고 싶다고 해서 차에 실어 서울로 보내기까지 했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았던 날림 발굴이었다던 것이다. 지금이야 유물에 대한 의식이 높아져서 그나마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뒤꽂이(왕). 국보 159호. 

뒤꽂이는 머리에 꽂아 머리모양을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실용적인 기능과 함께 뒤꽂이 자체의 장식으로 머리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는 장식적인 용도를 가진 장신구이다.



귀걸이(왕) 국보 156호. 귀걸이(왕비) 국보 157호.

음... 귀 떨어지겠는데? 


 


관장식(왕) 국보 154호. 금동신발(왕).

왜 순금을 선호하는지 단박에 깨닫게 되는 유물이다. ㅎ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빛을 발하는 금 장식구들과 달리 금동은 부식되어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다. 그래봤자 이제 죽은 사람에게는 그게 금이든 금동이든 아무 상관없잖아?


 


베개와 발베개.


 


 유리동자상

왕비의 허리부근에서 두 점이 발견되었다. 머리를 깎고 손을 합장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으며 한 점은 하반신이 파손되어 있다. 이 동자상은 왕비가 살아있을 때 부적과 같이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장신구에 매달아  왕비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수호신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남조시대 중국에서도 이런 물건을 몸에 지니는 풍습이 유행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옹중'이라 불렀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백제에서 이와 같은 동자상을 몸에 지녔던 것은 그 무렵 중국과 백제의 풍속이 많이 닮아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동자상은 불교의 승려 또는 도교의 도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글자있는 용 장식 은팔찌. 국보 160호.

글자가 새겨진 팔찌로 왕비의 왼쪽 손목 부분에서 발견되었다. 팔찌의 안쪽에 팔찌를 만든 때와 만든 사람의 이름, 팔찌의 주인 등 그 제작 연유에 대한 글을 세로방향으로 새겼다. 그 내용은 "경자년(520년) 2월에 다리라는 장인이 대부인, 즉 왕비를 위하여 230주이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경자년은 왕비가 죽은 병오년(526년)보다 6년 앞선 시기로 문장에 나타난 230주이는 무게 단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은잔

왕비의 머리부근에 놓여 있었던 은으로 만든 잔이다. 잔과 뚜껑은 은으로 만들었고, 잔받침은 동으로 제작하였다. 뚜껑의 꽃봉오리 모양 손잡이 아래를 금꽃잎으로 장식하였고, 뚜껑과 잔, 받침의 겉면에는 산과 골짜기, 노니는 짐승, 나무, 연꽃잎, 구름, 용을 새겨 극락정토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백제 도제불상대좌

1986년 청양군 본의리에 있는 백제시대 가마터에서 파편상태로 수습되었으며, 복원 결과 높이 1미터 폭 280cm의 초대형 불상받침으로 밝혀졌다. 좌우 대칭의 옷자락이 가지런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주름 처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법륭사 금당석가삼존 등 일본의 불상받침에 전승되고 있어 당시 백제 불교미술의 국제적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제작 시기는 백제 말기인 7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서혈사지 석불좌상. 보물 979호

공주시 웅진동 서혈사터에서 발견된 부처상이다.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여 다리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무릅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린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대좌는 여덟 잎의 연꽃을 표현하였으며, 대좌를 받치는 지대석에는 극락의 천사인 천인과 인간의 얼굴을 한 상상의 새 가릉빈가를 새겼다. 전체적인 자세와 세부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돌곰

무령왕릉 맞은 편 남쪽 구릉의 경사면에서 출토되었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여 선명하지 않은데 본래부터 강한 선으로 조각되지 않은 것 같다.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약간 위로 향하고 있으며, 앞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를 구부려서 앉아 있는 모양이다. 입을 다물고 양쪽 눈은 뜨고 있으며, 양쪽 귀는 뒤를 붙어 있다. 곰나루와 가까운 이 지역은 예로부터 곰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돌곰이 출토된 곳이 바로 곰사당이 있던 자리로 생각된다.



 그저 오래된 물건들은 잔뜩 쌓아놓은 건물에 불과했던 박물관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물건에 얽힌 이야기들이 다양하고 그 형태의 아름다움도 인상적이다. 반짝이는 금덩이보다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 같은 물건들이 더 오래 기억된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진묘수, 유리동자상, 은잔, 돌곰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이 작은 물건 하나에 얽히고 얽힌 다양한 사람이 이야기가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