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대를 바라보다

[연극] 부뜰이네 -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그로테스크

연극 부뜰이네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그로테스크

 

  연극 <부뜰이네>는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의 <가내노동>을 각색한 작품이다. 지난해까지는 <가내노동>이라는 제목 그대로 무대에 올려졌지만 이번엔 새로운 제목으로 무대에 올려진 것이다. 얼마전 그의 <오버외스터라이히>를 각색한 <경남 창녕군 길곡면>을 재밌게 봤었다. 원작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작품의 줄거리로 보았을 때 두 작품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겨야만 할 것 같았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은 확실히 일정한 분위기를 가진다. 그런데 <부뜰이네>는 애매모호하다. 그 애매한 분위기는 암전되는 동안 흐르는 음악과 배우들의 분명치 않은 연기 혹은 대사에서 나온다. 우울한 분위기에서 경쾌하고 익살스러운 음악은 이 연극을 기괴하게 만든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조리극같은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극을 끝까지 보고 난 후에 든 생각은 확실한 색깔을 만들지 않은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든다. 그건 아마 <경남 창녕군 길곡면>을 계속 떠올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지만 배우들의 대사나 연기가 심드렁한 부분이 있다. 아마 그건 희곡에 충실한 모습일 것이다. 가난이 가져온... 무기력이라기 보다는 그 어떤 상황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는... 항상 어깨를 펼 수 없을만큼 큰 짐을 지고 있어서 버럭 화를 내며 어깨를 펼 수 없는 것이다. 아내가 임신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는 조금 더 밝은 이미지를 보여주고 암전시 들려주는 음악은 그대로 유지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 경쾌한 음악을 사용하면 분위기가 너무 모호해지는 것 같다.

 

* 스포일러 있음

아내가 남편에게 후회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스릴러에 나올 듯한 음악이 흐른다. 이건 복선이다. 관객들은 기대한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선택이라고는 그저 집을 나가 친가로 가는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며 그들에게는 큰 일탈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작품은 기괴하다. 아이를 없애기 위해 뜨개바늘을 자궁 속으로 밀어넣고, 아이는 뿔이 두 개 달린 기형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없는 사이 아이를 죽인다. 이 세 장면이 가장 기괴한데 그들의 삶은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마치 작은 부부싸움을 하는 듯 그리고 그 싸움이 끝난 듯 일상을 살아간다. 남편이 아이를 죽였을 거라고 아내는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담담하다. 아내는 어쩌면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일부러 집을 비운 것일까? 자신이 없으면 남편이 아이를 죽일 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다시 덜 힘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생각이 맞았다. 그들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남편의 일이 잘 풀려 어쩌면 전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듯한 분위기다. 무섭다. 마치 오랜 전쟁 중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위와 무덤덤함, 작은 안위에 대한 갈구가 가난이라는 것 때문에 생겨난 것만 같다. 그들이 돈이 많은 부자였다면 어땠을까? 사실 그들이 잘 살았다면 아이를 낙태했을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다. 적어도 아내가 아이가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들의 가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무대 디자인이었다. 비밀하우스에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과 욕실이 없어 물을 대야에 받아서 사용해야 하고 끊여야 하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은 암전시 남자가 만들어 놓은 개의 교미하는 모습을 조명으로 비추는 건 왜 일까? 처음 한 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전 장면이 그것을 설명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 후에도 여러번 그것을 비추는 의미를 잘 모르겠다.

  위 에서 말한 기괴한 세 장면보다 연극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은 여자가 친정에서 돌아와서 씻는 장면이다. 극의 초반에도 나오는 장면으로 그들의 삶이 완전히 아기가 없었던 때와 같아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가 씻고 있는 그 대야... 그 대야는 남자가 아기를 죽였던 그 대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