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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차이나 여행기

취푸 여행, 지난 2500년간 공자를 기리고 있는 사당 '공묘'


공묘(孔廟)라는 단어 때문에 공자의 묘라는 오해를 살 수 있는 곳이지만 실제 이곳은 공자의 위패와 신주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다. 공자의 묘를 비롯한 공씨들의 무덤은 공림(孔林)으로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있다. 기원전 479년 공자가 사망하고 그 다음해인 BC 478년 공자의 옛 집에 세워졌다. 2천년동안 그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거대해져갔고 자금성과 같은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1499년 화재로 거의 모두 소실되었다가 명과 청나라때 다시 지어졌다. 공묘가 확장되어 간 것은 공씨 집안의 후손이 아니라 각 시대의 황제들에 의해서였기에 공묘 안에 있는 건물과 비석등의 유물들이 더 소중히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공묘는 자금성, 청더피서산장과 함께 중국의 3대 고건축물로 손꼽히는데 3대 건축물 모두 세계문화유산이다. 중국 여행을 하다보면 공자를 위한 사당을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고 거리 이름이 공자거리 인 곳도 많다. 공자는 이제 위대한 스승이라기보다는 뭔가 신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론리플래닛 지도에는 매표소가 성곽 안쪽에 그려져 있어서 한참을 헤맸다. 매표소는 성곽 바깥쪽에 있다. (망할 론리) 매표소에서 공묘, 공부, 공림에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콤비네이션 티켓(150위엔)을 구입할 수 있다. 개별 티켓팅 하면 공묘(90위엔), 공부(60위엔), 공림(40위엔)이다. 론리 플래닛에는 공자가 너무나 사랑한 제자 안회의 사당인 얀미아오(颜庙, yan temple)도 콤비네이션 티켓도 포함되어있다고 써 있었지만 실제로 입장을 시도했을 때 퇴짜 맞았다. 콤비 티켓에도 공묘, 공부, 공림만 써 있다. (망할 론리).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오픈한다. 8시부터 정문 앞에서 공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리 가서 이 공연을 보는 것이 좋다. 공연이 끝나고 공연자들의 뒤를 따라서 공묘로 들어갔다.



공묘는 문을 통과하면 또 문이 나오는 구조의 건물이다. 각 문과 건물, 부조들에는 모두 설명이 달려있는데 세워진 년도와 관련된 사람 이름만 적혀있을 뿐 특별한 스토리텔링이 없어서 조금 지나다보면 그게 그거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붉은 글씨의 첫번째 문을 지나 두번빼로 마주치는 문은 링싱먼(棂星门)이다. 명나라 영락제 때인 1415년 세워졌다가 청나라 1754년 다시 세웠다. 노란 글씨의 링싱먼이라는 세글자는 황제 건륭이 쓴 글씨다. 과거 중국에서는 하늘에 받치는 제물에 이 링싱먼에 놓아두곤 했다. 이 문을 지나고 만나게 되는 것이 초록색으로 글이 쓰여있는 1544년에 세워진 화합과 생명의 문이다.


  



사슴 몸, 소 꼬리, 말 발굽을 가지고 있다는 고대의 상상 속 동물 기린이다. 기린은 공자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공자의 엄마가 공자를 임신하였을 때 기린이 나타나 위대한 성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했고 공자의 죽음 전에는 기린이 크게 다치면서 죽음을 암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린은 위대한 성인의 등장과 죽음을 암시하는 동물로서의 역할도 한다. 이러한 내용은 유교쪽에서 바라본 '기린'이기에 불교 유적지에서도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이 나타난다. 



진으로는 작아보이지만 모두 사람의 키를 넘는 크기들이다. 중국은 무조건 커야하나보다. 아기자기한 맛이 없다. 거대한 공간에 쓸데없는(?) 공간들도 많다.


  


비수이교라 불리는 다리로 1500년 명나라 효종 때 세워졌다가 청나라때 다시 지어졌다. 비수이라는 이름은 물이 공묘 주위를 도는 것을 뜻한다. 


 


공자의 사상인 유교는 보수적이고 체제유지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2500년 동안 크게 확장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교의 이런 성격이 통치자들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세워지기 전 600년이나 유교의 국가 조선이 있었기에 한국도 유교가 우리의 전통이며 당연히 따라야하는 가치관인 듯한 경향을 가진 시대도 존재했다. 물론 지금도 그 영향에서 벗어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전만하지는 않겠지. 공자의 사상이 자신의 통치에 이로움을 알고 있던 중국의 황제들은 그의 제자들만큼 공자를 떠받쳤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에게 작호를 내리며 점점 신분을 상승시켰다. 그리고 결국 공자는 '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The KuiWen Pavilion. 1018년 송나라 때 처음 지어져서 이곳저곳이 고쳐졌다. 중국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다. 사실 공묘에는 수 많은 건물과 문, 비석이 있는데 모두가 인상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눈에 띄는 것은 용조각이 세겨진 단청 게이트와 가장 큰 건물인 대성전, 붉은 기둥이 줄지어 있는 이스트 윙과 웨스트 윙 정도다. 아, 로벽도 기억에 남는 곳이다. 공묘는 작은 선물을 큰 상자에 싸고싸고싸고를 반복해서 거대하고 불필요한 포장이 엄청나게 많은 물건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 포장은 중국이 공산화 된 후에 팍 하고 찌그러졌지만 이것도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중국은 지금 다시 그 찌그러진 포장을 곱게 펴두고 더 크게 포장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공자의 흔적은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dacheng gate. 1104년 송나라때 지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조각들을 손으로 문지르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그 조각 속 용의 기운이 자신에게 들어오기라도 하는 듯 정성스럽게 여기저기를 문지른다. 중국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다. 이 기둥이 너무나 화려해서 황제들이 공묘를 방문할 때는 천으로 이 기둥을 가렸다고 한다.


 


the east wing rooms. 맞은편에 웨스트 윙 룸도 있다. 붉은 기둥이 줄지어 있는 복도는 공묘에서 사진 찍기 가장 좋은 곳이 아닐까싶다.


 

xingtan pavilion


대성전(dacheng palace)으로 공묘의 대표건물로 45.78미터의 높이를 가지고 있으며 공자상이 모셔져 있다. 여기서 정해진 시간에 공연이 이루어진다. 내가 본 공연은 오전 11시.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공묘 구경하기의 색다른 즐거움은 바로 이런 공연들이다.



  


한쪽 구석에 청나라와 그 전 시대의 조각들을 전시해 놓는 건물들이 몇 개 있었는데 나름 꽤 괜찮은 조각들이었다. 사람들이 들고나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지만 지키는 분도 있다.



로벽(鲁壁).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들을 이 벽 안에 넣고 밀봉해서 그 서적들을 지킬 수 있었다. 진시황이 죽고 50년이 넘은 기원전 154년 숨겨진 책들이 발견되었다. 진시황은 정말 말년에 미친 것일까? 서적이 귀한 시대이기에 민간의 서적들을 찾아내서 모두 불태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좀 살만한 집만 찾아다니면 되니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견디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것이 그를 중국 최초의 통일 왕국을 이룬 황제로 만들었고 말도 안되는 많은 짓을 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안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도시마다 그 도시를 대표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 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