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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사이를 지나

[소설] 화성연대기 - 디스토피아지만 멋진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소설 화성 연대기

 디스토피아지만 멋진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성 연대기>라는 제목이 왜 낯설지 않을까? 난 SF매니아가 아니다. 소설도 대개 장르물보다는 순수소설을 보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제목의 SF소설이 <화성 연대기>였다. 이 책의 표지에 써 있는 화려한 수식어들. SF문학의 살아 있는 전설, 레이 브래드버리 대표작. 당신이 알고 있는 화성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이 책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구들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느낄 수 있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다른 책들을 보고 싶어졌다. <유령여단>에 이어 읽는 샘터 외국소설선인데 이것도 맘에 든다. 이거 은근히 색깔을 가진다. 샘터 외국소설선 눈여겨 봐야겠다. SF소설 중에선 단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화성 연대기>는 엄밀히 말해 단편소설집이다. 하지만 소제목 앞에 붙어있는 연대가 1999년부터 2026년까지 연이어 있고 배경이 겹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책 말미에 역자가 어느 부분부터 봐도 무방하다고 했지만 앞에서부터 차례로 보는 것이 낫다. 시트콤을 볼 때 앞에서부터 보면 모든 관계와 웃음코드를 이해할 수 있지만 시트콤이 한편씩 완결되는 이야기라고 여겨 중간부터 보면 이해가 온전치 않은 날도 있는 것과 같다. 브래드버리가 바라보는 미래는 디스토피아다. 그가 그려내는 미래가 진짜가 되지는 않겠지만 인물들의 감정과 화성의 분위기는 진실성 있게 다가온다. 

 

  "나는 지구를 떠나고 싶어.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면 누구나 그럴걸? 2년 안에 지구에서 대규모 핵전쟁이 일어날 테니까 말이야. 난 그때 지구에 있고 싶지 않아.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처럼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 수만 명이 화성으로 가고 싶어 해. 그 사람들한테 한번 물어봐! 전쟁과 검열과 국가주의, 거기에다 징병에다 이런저런 국가의 통제, 예술과 과학에 대한 국가의 규제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단 말이야! 지구는 당신들이 다 가져! 화성에 갈 기회만 얻을 수 있다면 멀쩡한 내 오른손이든 심장이든 목이든 뭐든 다 내놓겠어! 어떻게 하면 로켓을 탈 수 있는 거야? 어디에 서명하면 되는 거지? 누구를 통해야 하는 거냐고?"

 

 오래 전 마을의 관습이 싫으면 마을을 떠나면 되었다. 그 후 국가의 정책과 왜곡된 사회가 싫으면 모국으로부터 도망치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전세계는 하나의 모습을 가졌다.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모든 면에서 점점 더 같은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 보라색 사내처럼 지구를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소리쳐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내의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태양계에서 탈출해야 할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이건 <화성 연대기>에도 담겨져 있다. 인류가 화성에 정착하면서 화성이 지구와 같아지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 물론 이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자도 나타난다. 이건 지구가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 세계로 팽창했던 당시와 담은 것 같아 씁쓸하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결국 어떻게 될까? 1만년쯤 뒤 화성과 지구는 각각의 독립된 개체일까? 처음엔 화성이 지구의 식민지쯤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오랜시간이 흐르면 화성인들만의 화성이 될 것이다. 미국과 호주 같은 나라가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처럼.

 

 

   마이클이 말했다.

   "나는 항상 화성인이 보고 싶었어요. 화성인 어디 있어요, 아빠?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저기 있다"

   아빠는 마이클을 어깨에 태우고는 똑바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 화성인들이 있었다. 티머시의 몸이 살짝 떨렸다.

   화성인들이 거기에, 운하에, 물에 비치고 있었다. 티머시, 마이클, 로버트, 엄마 그리고 아빠.

   화성인들이 티머시네 가족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물에서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화성에 살면 그것이 화성인이다. <화성연대기>의 마지막 장면은 비장하고 슬프고 희망적이다.

 

  그들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과 어울려 사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최고이고, 동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하지도 않았고요. 바로 그런 생각이야말로 다윈이 나타난 뒤에 우리가 저지른 잘못입니다. 우리는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를 받아들였습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요. 그러다가 다윈과 우리가 믿는 종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요. 혹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보였어요. 우리는 다윈과 헉슬리와 프로이트의 시각을 바꾸려고 용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시각을 좀체 바꾸지 않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여느 바보들처럼 우리의 종료를 쓰러뜨리려고 했습니다. 그 시도는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잃고,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이 단순히 좌절된 욕망의 무분별한 분출에 지나지 않고, 종교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면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앙은 모든 일에 대해 언제나 우리에게 해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프로이트와 다윈과 함께 하수구로 떨어져버렸지요. 우리는 버림받은 존재가 되어버렸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상태입니다.

 

 우리가 무수히 영화에서 보아왔던, 인간을 위협하는 화성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화성은 마치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는 숨겨진 이상향같은 모습을 보인다. 화성인에 대해서도 이상적으로 이야기한다.

 

 화성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왜 사느냐'는 그 질문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 자체가 답이니까요. 삶이란 더 많은 삶을 낳는 자기증식 과정이며, 최대한 잘사는 것이 바로 삶의 의미입니다. 화성인들은 자신들이 '대체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때가 전쟁과 절망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해, 답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일 때 말입니다. 그러나 문명화 과정이 안정기에 접어들고 정쟁들이 끝나자 그 질문은 또 다른 이유로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삶이 편하게 되었는데 새삼 논쟁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 결혼은 사람을 늙고 무료하게 만든다.

 

* "키가 185센티미터쯤 되어 보였어요."

   "말도 안돼. 거인이잖아. 기형적인 거인."

   "그런데 이상하기......"

   부인은 머뭇머뭇 말했다.

   "보통 사람 같았어요. 그렇게 키가 큰데도 말이예요. 그리고...... 아마 당신은 날 바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사람 눈동자가 파랬어요!"

   "눈이 파랗다고? 맙소사!"

 

* 지금 우리는 너무 위험한 상대와 게임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시간 말입니다.

 

* "언제부터 여기 사셨던 거예요, 할머니?"

   러스티그가 물었다.

   "죽은 뒤로 죽."

   할머니가 톡 쏘듯이 대답했다.

 

* "여기가 천국입니까?"

   힝크스턴이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말도 안 돼요. 아니에요. 여기는 이승이고, 우리는 제2의 인생을 살 기회를 얻은 거예요. 우리에게 이유를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왜 지구에 살았는지 말해준 사람도 아무도 없었잖아요? 우리가 떠나온 지구 말이예요. 당신들이 살고 있는 지구 말이에요. 그 지구 앞에 또 다른 지구는 없었다고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지요?"

 

* 핵무기를 가진 지구인에 맞서 화성인이 쓸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무엇일까?

   흥미로운 답이 나왔다. 텔레파시, 최면술, 기억, 상상력.

 

* 아침이 되자. 관악대가 구슬픈 장송곡을 연주했다. 거리에 잇는 모든 집에서 기다란 상자를 멘 단출하면서도 엄숙한 장례식 행렬이 나왔다. 할머니, 어머니, 누이, 형, 큰아버지, 아버지들이 울면서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걸어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서는 새 무덤을 파고 새 묘비를 세웠다. 모두 합쳐 무덤 열여섯 개, 묘비 열여섯 개. 

 

* "알지요. 몸이 안 좋았습니다. 나쁜 짓을 할 때 사람은 자신을 속이게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빠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요.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야 저는 그들이 그저 어리석은 인간들일 뿐이며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지요. 제 마음 상태가 그랬으니 어떻게 일을 계속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곳으로 올라와 혼자 누워서 분노를 키우고 다시 적개심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겁니다."

 

* 만약 일이 잘 진행되면 원자력 연구소 세 곳과 원자폭탄 저장소를 화성에 설치하겠다던 것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화성은 끝장입니다. 이 훌륭한 것들이 모두 사라질 겁니다. 화성인들이 백악관 마룻바닥에 오물을 토해놓는다면 대장님은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 영리한 것 같지도 않고 영리하고 싶지도 않을 때 영리한 것, 난 그게 정말 싫어. 슬금슬금 돌아다니다가 어떤 계획을 하나 세우고는 그게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것.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진정으로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이 정말 싫어. 오대체 우리가 뭐야? 다수파? 그게 정답인가? 다수는 언제나 신성한 거야? 언제나, 언제나 신성하고 아주 작은 순간, 아주 사소한 경우에도 결코 틀리지 않는 거야? 그런 것이야? 천만 년 동안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아? 도대체 이 다수의 정체는 뭐고, 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해서 그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그 생각은 영원히 바꾸지 않는 거야? 이 썩어빠진 다수에 내가 가담하다니, 이런 난감한 일이 있나! 나는 지금 마음이 편치 않아. 폐쇄 공포증인가? 군중을 무서워하는 공포증인가? 아니면 상식을 무서워하는 공포증? 온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 인간이 옳을 수도 있을까? 그래, 이제 이런 생각은 집어치우자. 배를 깔고 기어 다니다가 제멋대로 흥분해서 방아쇠를 당겨버리는 거야. 그래, 그거야. 바로 그러야!

 

* 맞아, 정말 이제 우리는 밤마다 뭘 해야 하지? 이제 녀석들이 사라졌으니, 뭘 해야 하나?

 

 

* 아, 처음 시작은 아주 사소했어요.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작은 모래알 하나에 불과했지요. 맨 먼저 만화책을 규제하기 시작했어요. 그다음 탐정소설, 그리고 당연히 영화를 규제했지요. 이런저런 방법으로, 이런저런 그룹을 규제했어요. 정치적 편견, 종교적 편견, 조합의 압력. 뭐가 됐든지 간에 그것을 두려워한느 소수의 사람들은 늘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대다수 사람들이 암흑을, 미래를, 과거를, 현재를,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게 되었지요.

 

* "나는 그 누구도 아니에요. 나는 다만 나일 뿐이에요.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는 어떤 존재예요.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당신을 어떻게 도울 수 없는 존재예요."

 

* 당신들은 신의 섭리를 의심하지 않잖아요. 현실에 불만족스럽다면, 차라리 꿈이 좋을 수도 있어요. 내가 이미 사망한, 어떤 사람들의 진짜 가족은 아닐지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진짜 가족보다 더 좋을 수도 있어요. 그 사람들의 마음이 빚어낸 이상적인 모습이니까요. 저는 이 집 사람들을 슬프게 하거나 당신 부인을 슬프게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요.

 

* 나는 그 누구도 아니에요. 나는 다만 나일 뿐이에요.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는 어떤 존재예요. 그리고 지금의 나는 당신을 어떻게 도울 수 없는 존재예요.

 

* 그게 좀 웃기는 일인데요, 네, 저는 우리가 모두 돌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치, 원자폭탄, 전쟁, 압력단체, 편견, 법률,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건 저도 잘 압니다만, 그래도 지구는 여전히 우리의 고향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첫 폭탄이 미국에 떨어지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사실 사람들이 이곳에 오래 산 것도 아니잖아요.

 

- 화성인. 배. 노점 ; 공포가 만들어내는 소통의 단절

 

* 우주는 마취제였다. 1억 킬로미터의 거리는 사람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기억을 잠들게 하고, 지구에 사는 사람들을 없애버리고, 과거를 지우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일에 전념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 온갖 일이 한꺼번에 벌어지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미친 듯이 시간을 알리는 시계들 때문에 집은 삽시간에 시계방처럼 되었다. 완전히 아수라장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질서가 남아 있었다. 누구 할 거 없이 노래를 불러대고 비명을 질러대는 와중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청소쥐 몇 마리가 끔찍한 잿더미를 치우려고 용감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 하나가 이 모든 상황을 초탈한 채 불타고 있는 서재 안에서 고고하게 큰 소리로 시를 낭송하고 있었다. 모든 테이프가 타버릴 때까지, 모든 전선이 흐믈흐믈 녹고 모든 전기회로가 터져버릴 때까지.

 

* "얼마나 더 가야 해요?" 

   로버트가 한 손으로 물을 찰싹찰싹 튀기며 물었다. 보라색 물속에 담근 손이 마치 팔딱거리는 게처럼 보였다.

   아빠는 후유 하고 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백만 년."

 

* 지구의 모든 법과 신념이 불에 타 한 줌의 뜨거운 재로 변했다. 그리고 잠시 뒤 바람에 실려 날아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