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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차이나 여행기

우한 황학루, 천하강산제일누각


 황학루는 우한(무한)을 대표하는 건물로 우한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르게 되는 곳이다. 중국 호북성 우한시 무창구 사산의 산꼭대기에 높이 솟아있고 '천하강산제일누각'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황학루는 삼국시대의 황무 2년 (223년)에 건설되어 많은 문학가와 서예가들이 시를 읊고 글을 쓰던 장소였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곳에 많은 글들이 남겨져 있다. 이제까지 전해보존된 시는 천수이상이고 문장은 백편 이상이다. 오늘날 황학루의 경치는 더 화려해졌다. 황학루에서 바라볼 수 있는 풍경도 달라졌거니와 중건된 건물 또한 많다. 중건된 건물은 황학본누각, 백운각, 악비광장, 천년축복길상중, 낙매헌, 시사비석복도 등이다. 수백년전에도 중국의 뿌옇을까? 그때는 선명했을까? 수 많은 사람들이 나무를 연료로 사용했을 때는 지금과 별 다를 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황학루는 중국에서 첫 5A 국가급 관광지로 선정 된 곳이기도 하다. 



입장료 : 80위엔

입장 시간 : 7시 30분 ~ 17시 30분 (18시 30분, 여름)

공연 시간  10:30 - 11:00,  12:00 - 12:30,  14:30 - 15:00,  16:00 -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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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루에 들어가면 커다란 그림을 볼 수 있다. 건물 위로 올라갈 수 있고 각 층에거 전망을 볼 수 있다. 하늘을 파랬지만 시야가 좋지는 않았다. 물론 중국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는 나쁜 편은 아니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달리 일반 사람들이 사찰이나 유적지에 있는 종을 칠 수 있다. 물론 돈을 내야한다. 보통 1번 2번 3번을 연속으로 친다. 작은 전시실에는 중국의 소수민속을 그림이 걸려있었다.



 석조정은 옛날에는 석경정이라고 불렀으며 송나라 시대에 건설하였다. 역사에 의하면 황학루 서쪽 아래 벼랑에는 거석이 있는데 거울처럼 빛났고 사람이 비쳐지며 석양속에서 붉게 빛나 석조라고 불리운다. 거석 옆에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얻었다. 명나라 시대에 본 정자가 파괴되고 청나라 강희 43년(1704년)에 복건되고 가경년사이에 또 다시 파괴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93년에 산을 따라 거석을 뒤로하여 건설되었으며 2기둥, 반화강암석체로서, 길이는 3.59M. 정자의 높이는 5.12M이다. 정자 내벽에는 흑사석 1개가 박혀있으며 돌 거울을 대표한다. 정자의 이름은 당시 강소성 서예협회 비서장 판우(전원)의 친필이다.

 <귀학도> 부조는 <구구 귀학도> 부조라고도 부른다. 백용지 옆에 위치하며 폭면이 넓고 기세가 웅장하며 길이는 38.4m, 높이는 4.8m다. 전체 조각은 사천성 양산 이족 자치구 하덕현의 조홍색 화강석(본 석자재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화강석임)을 수십명의 석공들이 2년반의 시간을 거쳐 정성껏 조각 한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가장 큰 실외 고부조 화강석 부조 작품이다. 전체 조각은 학서, 학회, 학무, 학상, 항명 등 5개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배치가 합리하고 일체를 형성하며 생기로 넘쳐 현대 조각의 정품으로 불리운다.



 황학루가 있는 공원의 한쪽 구석에 악비조각상이 있다. 악비(1103 ~ 1141)는 남송 시대의 학자이자 무장이었다. 서예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북송 말에 전공을 쌓았으며 후베이 일대의 대군벌이었다. 뛰어난 인물은 주위의 질투를 받기 마련인지 그는 서른아홉에 그를 모함하던 간신들과 무능한 왕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악비조각상은 8미터, 무게 16톤으로 1993년에 청동으로 주조 되었다. 이 지역의 유명인사(?)이기에 이곳에 조각상에 만들어진 것이다.

 남루는 만원루, 괴월루라고도 부르며 민간에서는 '고루'라고 부르며 옛날에는 무창 10절경의 하나였다. 남루는 진나라(북송이라고도함)부터 건설 되었으며 역사상의 수 많은 문인들이 그 위에서 시를 읊었다. 그 중에는 송나라의 육유, 범성대 등의 유명한 글들이 있다. 현재 건물은 1985년에 복건하였으며 뒤에는 산이 있고 앞은 남향이며 길이는 16.5m, 넓이는 7.5m, 높이는 9.5m, 상하 2층이다. 방전목 구조이다. 정면 처마 밑에 있는 '금고일남루'라는 간판은 유명한 서예가 왕거상의 필채이며 기둥의 글은 당시 중국 서예가 협회 부주석 이탁이 쓴 것이다.


▼ 악비조각상. <미불 배석> 동상. 남루

 영주 성곽 유적지. 영주성은 또한 영성이라고도 부르며 남조 시대의 유송은 삼국시대의 손권이 건설한 하구성을 확대 건설하였으며 영주에 도업지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 후 제, 량, 진나라가 이 곳을 영주 도업지로 하였다. 수나라 시대는 악주이고 강하현을 하설하였으며 주와 현을 전부 영주성 내에 설치 하였다. 영주성은 유송으로부터 시작하여 수나라부터 근 500년동안 성곽이 폐기되지 않았다. 현재 남은 영주성곽은 황학루 뒤측 동쪽으로부터 백운각까지이며 전체 길이는 300m이며 시급 문물 보호 구역이다.






 백용지는 원래 황학루 좌측에 있었다. 역사의 기재에 의하면 명나라 1568년에 강변 지역에 화재가 많았으며 시민들은 두려워 하였다. 나중에 운유방사가 계책을 내어 황학루 좌측에 늪을 파고 강물을 주입하여 백용을 모셨는데 그 후부터는 화재가 없었다고 한다. 후인들은 이곳을 '백용지'라고 부른다. 현재 백용지는 1986년에 새로 발굴 하였다. 수심 2미터이며 늪에는 연꽃이 피어있고 푸른 파도가 출렁인다. 흰구름이 그 속에 비쳐지며 물은 산을 배경으로하고 산은 더욱 수려한 물을 보여주어 산수가 일체를 형성한 경관이다.



황학루에 오르면 우창지역 뿐 아니라 강 건너 한양, 한국 지역까지 다 보인다. 뿌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