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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강서둘레길 1코스, 개화산 숲길의 어마무시한 매력을 알게되다


 따뜻한 봄날의 휴일. 햇살 아래서 좀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걷다보면 힘들고 귀찮아지겠지? 그래 적당히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자는 생각으로 검색을 했다. 몇년 전부터 전국 곳곳에 걷는 길이 만들어져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즐거움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좀 걸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걷는다는 길들을 찾아보니 수십km에서 수백킬로미터에 이른다. 아... 이건 뭐지? 난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 산책처럼 걸을만한 길을 찾는 거라고!! 그래서 찾아낸 길이 강서둘레길이다. 우선 가깝다. 그리고 3코스로만 이루어져있다. 1코스는 3.35km에 예상시간 1시간 10분.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산책하기에 좋은 길인 것이다. 걷고 싶을 때마다 강서둘레길을 찾았고 결국은 1, 2, 3코스를 모두 걸었다. 그 중 내게 가장 좋은 길은 1코스였다. 



 강서둘레길 1코스는 개화산 숲길을 걷는 코스로 되어있다. 1시간 남짓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매력적인 것들이 참 많다. 1코스를 걷기 위해서는 방화역 3번출구로 나와 방화근린공원에서 시작하는 방법, 개화산역 2번출구로 나와 개화초교 방향으로 접근하는 방법, 개화역 1번출구로 나와 미타사에서 시작하는 방법 등이 있다. 난 강서한강공원에 있었기 때문에 개화산전망대에서 약사사 방향으로 걸었다. 개화산은 128미터의 작은 산이지만 꽤 넓은 산이다. 가로등이 설치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밤에 걷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위의 약도에서 진로아파트에서 약사사로 향하는 회색길은 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 가로등이 설치되어있다.



 개화산 전망대

개화산 전망대는 서울시 선정 우수조망명소로 꼽힌 곳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서는 강 건너 행주산성에서 북한산, 방화대교, 월드컵공원, 가양대교, 서울타워, 63빌딩까지 볼 수 있다. 물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보통 행주산성과 방화대교만 잘 보이는 것 같다. 전망대 안내 표지판에서 눈에 띄는 것은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과 현재의 풍경을 비교해 놓은 것이다. 겸재 정선은 65세였던 1740년 초가을부터 70세까지 만 5년간 양천(강서구 가양동 일대)의 현령을 지내면서 강서지역을 중심으로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림으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옛 사람이 보기에도 이곳은 풍경 좋은 곳이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에도 지평선은 뿌옇게 되어버린 것이!! 우리나라도 중국의 도시들처럼 일년내내 뿌옇게 되는 건 아닌 지 걱정이 된다. 개화산 전망대에서 사람들이 풍경을 보지 않고 산 언덕배기를 계속 주시하고 있길래 뭐가 있나 봤더니 토끼한쌍이 있었다!!! 개화산에 토끼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누군가 키우다가 버린 것일까? 아니며 오래전부터 개화산에서 살아왔던 걸까? 개화산 전망대를 지나 약사사로 향했다.



 약사사

약사사는 겸재가 즐겨찾았다는 사찰로 사찰과 얽힌 이야기는 삼국시대까지 올라가고 창건은 고려시대에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약사사가 아닌 개화산의 이름을 딴 개화사였다. 신라시대 도인 주룡이 이 산에 살면서 매년 9월 9일에 동자 2명과 더불어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도인이 살던 곳에 고려 때쯤 절이 생겼고 절 이름을 개화사라고 하였다. 겸재의 '개화사'라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절은 냉천이 있어 병자가 목욕을 하면 오랜 병도 낫는 약수터라고 하여 조선 말기쯤에 약사사로 불려졌다. 17세기 이전에 대한 기록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39호인 3층석탁과 제 40호인 석불이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약 7~8백년의 역사가 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http://www.yaksasa.or.kr/    02-2662-2551, 7551



마침 부처님 오신 날을 며칠 남겨놓지 않아서 연등이 사찰 마당을 뒤덮고 있었다. 낮에 봐도 멋지지만 밤에 연등의 불이 들어오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밤에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연등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밤 8시가 넘도록 기다렸지만 연등의 불은 들어오지 않고 사찰에는 인기척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자판기에서 달달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연등에 불이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역시 밤의 풍경은 낮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더라.


 약사사 석불입상


석불입상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대웅전 불상 뒤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높이가 3.3미터로 처음에는 아래쪽이 땅에 묻힌 채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수 많은 불상들 사이에 돌로 만들어진 수수한 석불이 더 인상적이다. 



 약사사 삼층석탑

약사사 정원(?)의 한가운데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약사사 석불 입상이 모셔져 있던 금당 바로 앞에 서 있던 삼층석탑으로 약사사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개화산 중턱에 있는 이 탑은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서 있는데, 그 모습이 투박한듯하면서도 날렵하다. 이 석탑은 일층 기단과 삼층 탑신으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이다. 석탑의 받침부에는 사각형 지대석 위에 큼직한 사각형 기단과 판석으로 된 갑석이 놓여 있다. 다소 육중한 기단 위에는 갓기둥이 있는 1층 탑신과 틈직하고 가파른 지붕돌이 놓여 있고, 다시 2,3층 탑신과 지붕돌이 올려 있다. 탑의 몸체부는 투박한 받침부에 비해서 날렵한 모양이다. 이 석탑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의 희귀한 석탑의 예로 그 가치가 크다.



다시 그 날 낮의 강서둘레길로!!

강서둘레길은 길지 않은 길이지만 곳곳에 표지판이 참 많이도 되어있어서 아무리 길치라도 절대! 길을 잃을 수 없다.



 개화산 전망대에서도 생각했었는데 다음에는 도시락이나 간단한 간식을 싸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길이어서 그저 길만 걸을 생각을 하면 정말 가볍게 걷고 끝나버린다. 하지만 머무른다고 생각하면 좀 더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렇게 의자와 테이블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먹은 건 가방에 꼭! 다시 싸가야한다. 그리고 귤껍질 좀 버리지 말자!!


 강서둘레길 1코스를 걷고 있는데 100미터쯤 길에서 벗어나면 심정이 심은 나무가 나온다는 표지판이 나왔다. 심정이 심은 나무가 뭘까 궁금해졌다. 뭔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잠시 길에서 벗어나 나무를 보러갔다.

 방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조선 중종 때의 정승 심정이 심은 나무로 능말 옛터를 지키던 거목이다. 방화동 436-1에 소재한 이 은행나무(높이 26m, 수령 400년)와 느티나무(높이 26m 수령 450년)는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며 강인한 생명력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오고 있는 신목이다. 두그루의 나무 모두 보호수다. 이 나무들은 김포공항 북쪽으로 1km 떨어진 개화산 아래 품안 자리에 있으며, 옆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는 양지바른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곳은 정곡리, 긴동리와 더불어 방화동을 이루었던 능말옛터다. 이 마을은 조선 중종때부터 약 450년 된 자연부락으로서 지금의 김포 장능(원종왕능)이 터를 잡으려 했다가 약간 협소하여 자리를 바꾼 것에서 능말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여름 한철 주민들의 화합장소와 쉼터로서 사랑을 받았을만한 이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둘레가 각각 5.6m 3.8m되는 흑갈색의 아름드리나무다. 나무가 있는 곳에서 사방을 둘러 자갈을 깔고 보호경계를 표시하였고 그 안에는 지역도착주민 20명으로 구성된 능우회 회원들이 지난 1992년 10월 17일에 세운 능말옛터 애향비가 있다.


심정이 뜬끔없이 이곳에 와서 나무를 심은 것은 아닌지 그가 심은 나무를 본 곳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서 심정을 비롯한 그의 가문 묘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었다. 


 풍산심씨묘역

조선 중기의 문신 심정(1471~1531)의 묘로, 묘역 안에는 그의 아들 심사손, 심사순, 손자 심수경 등 풍산 심씨 가문의 묘 60여 기가 함께 마련되어 있다. 심정은 연산군 1년(1495) 생원시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06년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화천군에 봉해졌다. 중종 14년(1519) 경빈 박씨를 통하여 조씨전국의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결국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으나, 경주 박씨의 기묘사화를 일으켜 결국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으마, 경주 박씨의 동궁 저주사건이 드러나서 강서로 귀양을 갔다가 이항, 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으로 지목되어 죽게 되었다. 심정의 아들 심사손(1493~1528)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중종 18년(1523) 비변사낭관으로서 서북면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많은 관직에 올랐다. 심사손의 아들 심수경(1516~1599)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명종 1년(1546) 문과에 장원급제 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명종 17년(1562) 중종의 묘를 옮길 때 경기도 관찰사로 나라에서 쓰던 큰 상여가 한강을 건너는 다리를 설치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대사헌과 8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청백리에 추천되었고 선조 31년(1598)에 생을 마감하였다. 풍산 심씨 묘 60여 기 중에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이 4분의 묘와 묘비, 상석 등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뜬금없이 길 한가운데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크지도 않은 작은 고양이와 길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다. 길을 멈추고 저 녀석이 왜 저러나 지켜봤다. 녀석은 잔뜩 웅크렸던 몸을 일순간 도약했다. 녀석이 향한 곳에는 비둘기 한마리가 있었다. 푸드득. 쪼만한 고양이는 역시 사냥에 실패했다. 성공한 적이 있기는 할까. 민망한지 서둘러 가버리는 녀석. 토끼 한쌍은 개화산 전망대 아래에서 놀고 있었다. 커플인지 진한 애정씬을 보여주었다. -_-





 하늘길 전망대


해질녘 하늘길 전망대에 도착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하늘길 전망대에서는 김포공항에서 날아오르는 비행기와 지평선 너머로 내려앉는 해를 볼 수 있다. 벤치도 있어서 한참을 앉아서 여행을 떠나는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비행기를 구경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지는 붉은 태양을 보면 얼마나 설렐까? 몇 시간 후면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낯선 음식들을 먹겠지? 아... 여행가고 싶다!! 




 늦은 오후에 강서둘레길 1코스를 걸을 생각이라면 꼭 하늘길 전망대를 일몰쯤 지나갈 수 있도록 강추한다. 물론 완전히 어두워지기전에 내려올 것도 추천함. 석양으로 사라지는 비행기들을 보고 있자니 여행에 대한 열망이 무럭무럭 자라고 말았다. ㅎ




 개화사 


 사실 하늘길 전망대에 가기전에 개화사를 지나갔다. 강서둘레길에서는 개화사의 뒷편을 보게 되어서 오른쪽 사진처럼 지붕들만 보인다. 둘레길에서 내려와야 입구로 들어설 수 있다. 작은 사찰이지만 밤에 다시 개화사로 향했다. 그건 약사사에서 불이 들어온 연등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다행이 개화사는 화려한 연등을 보여주었다.




개화사 사찰 내부 뿐 아니라 사찰 앞 길에도 많은 연등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찰은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있어서 좋다. 아무도 없어도 그저 스윽 들어가서 연등을 둘러보고 댓마루에 잠시 앉았다가 나왔다.




강서둘레길 1코스 후기를 뜬금없이 개화사 연등으로 마무리하네. 위에서 열거한 것들 외에도 강서둘레길 1코스는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개화역을 통해서 미타사쪽으로 올라오면 그 사이에 내촌마을이 있다. 내촌마을은 벽화마을로 사진 찍기에도 좋은 곳이다. 햇살 뜨거운 날에도 울창한 숲길을 걷는 것이어서 걷기 좋은 곳이 1코스다. 아무래도 날 좋은 날 산책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길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