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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전주 여행] 치명자산 성지, 7인의 천주교 순교자 묘가 있는 한국의 몽마르뜨



 한옥마을 둘레길을 걸으면 치명자산 성지 앞을 지나게 된다. 치명자산 성지의 순교자묘와 성당은 산 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꽤 품을 들어야만 들를 수 있다. 한옥마을 둘레길만을 걸을 생각이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올라가 보기로 했다. 성당 뒤 쪽에 있는 순교자묘까지 오르면 전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점도 선뜻 치명자산을 오르게 해주었다. 그런데 300미터 밖에 하지 않는다는 치명자산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한숨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은 쉬엄쉬엄 올라가야했다. 치명자산과 마주하는 곳에 남고산이 있는데 그곳에 올라도 전주를 내려다볼 수 있다. 전주의 전경을 보고 싶은 여행자라면 남고산이나 치명자산을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십자가의 길로 올라가서 내려올 때는 성직자묘지가 있는 방향으로 내려왔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고난을 순서대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길을 내려오면 모든 사람들과 반대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치명자산은 예전에는 뒤에 있는 승암산과 함께 승암산, 중바위산으로 불리었는데 지금은 치명자산으로 불리고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루갈다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곳의 천주교 역사는 꽤나 유서가 깊다. 1784년 호남지방에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전파했던 곳으로 이 때 주도적으로 천주교 전파에 힘썼던 유항검을 비롯해서 그의 가족 7명이 순교하여 묻힌 곳이다. 신유박해 때 처형당한 이는 유항검과 그의 처, 아들과 며느리, 조카 등이다.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에 걸처 전주 남문 밖(현 전동 성당),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 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되었다. 그후 1911년 4월 19일 전동 성당 보두네신부와 신도들이 이 산정에 모셨졌다. 지금은 이 가족의 묘가 지방 기념물 제 68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아래는 기념 성당이 세워져 있다.




 쉬엄쉬엄 산을 오르다보면 어느새 산자락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작은 성당을 만나게 된다. 순교자 묘 바로 밑 위치해 있는데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1994년 5월 9일 건립되었다. 내가 모르는 찻길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특별한 날에만 미사를 봐야할 것 같은 위치에 있는 성당임에도 이곳에서는 매일 미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산을 매일 오르내리는 신자들의 믿음은 200년전 순교한 이들에 뒤쳐질 것 같지 않다.





  미사

월-금 오전 11시

토/일 오전 11:30

매월 첫째주 월요일 : 성직자 위령미사

매월 첫째주 목요일 : 성시간(10시), 성체신심미사(11시)

매월 둘째주 월요일 : 가정성화미사

사순시기 새벽미사(5:30) : 재의 수요일 ~ 성주간 수요일


홈페이지 http://www.joanlugalda.com/

전화번호 063-285-5755




 유항검과 그의 가족 7인의 순교자 무덤 (지방 기념물 제 68호)

유항검과 그 일가 7인의 순교자들이 함께 묻힌 합장묘다. 7명 모두 1801년 (신유박해)에 순교하였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리 출신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전주지방의 대부호였으며 1784년 이승훈으로부터 세계를 받고 천주교회에 입교한 후 호남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1786년에 조직된 가성직사단의 일원으로서 신부로 임명되어 1년 정도 활약하다가 가성직제도의 주당성을 깨닫고 이를 시정하는 데 공헌했다. 이후 신자들이 성사생활을 하기 위하여 하루 빨리 선교사를 모셔오는 것이 시급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도록 자신의 재산을 기쁜 마음으로 내놓았다. 그 결과 1795년 한국의 첫 선교사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유항검은 1801년 9월 17일 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하였으며 당국에서는 그의 목을 전주 풍남문에 매어달아 놓고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믿지않도록 경각심을 주었다. 그리고 유항검의 장남 유중철(요한 22세)과 차남 유문철(요한 18세)은 1801년 10월 9월 전주 옥에서 순교하였고 같은 해 12월 28일 전주 숲정이에서는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맏며느리 이순이(루갈다. 19세), 그리고 조카 유중성(마태오)이 순교하였다. 특히 이순이(루갈다)와 유중철(요한)은 세계 교회사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동정부부 순교자로서 "한국 순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이들은 각각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하여 평생 동정생활을 결심했고, 이 사실을 주문모 신부에게 알려드렸다. 주문모 신부는 당시 성년이 된 남녀가 일생을 동정으로 사는 것을 죄악시하였던 유교사회의 지탄을 피하면서 동정생활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의 결혼을 주선했다. 1797년 당시 15세였던 이순이는 18세인 유중철과 결혼식을 올리고 전주 초남이에서 남매처럼 4년동안 함께 살면서 효성을 다하여 부모를 섬겼으며, 현제들과 우애하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일곱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교우들이 유항검의 고향 초남리와 인접한 제남리에 이들을 가매장하였고 1914년 4월 19일 전주 전동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이곳에 안장했다. 전주시가 내려다보이는 이 산 위에 이분들을 모신 것은 이분들의 높은 정신을 기리고 이곳을 참배하는 이들이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 어려움을 통해서나마 순교자들께서 가신 길을 체험하게 하려는데 그 취지가 있었다.




 동정녀 마리아는 알았어도 동정부부이라니... 결국은 신부와 수녀가 되었어야 할 이들이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일인 것이다. 순교자 무덤의 왼쪽으로 작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전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전주 여행의 핵심은 한옥마을이고 지금은 주위의 많은 볼거리로 확장되어가고 있는 분위기인 것 같다. 치명자산자락에서는 그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생태박물관, 한벽당, 자만벽화마을, 전주향교, 오목대, 한옥마을, 남부시장, 국립무형유산원까지.






 혹, 한옥마을 둘레길을 걷는 사람 중 치명자산에 오르기 힘든 이라면 산 아래 있는 몽마르뜨 광장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나마 이곳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의미의 파리 몽마르뜨 언덕처럼, 야외 음악회와 소풍지로도 사랑 받는 몽마르뜨 광장과 신도들이 손수 조성한 기도 꽃길은 조용히 명상하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어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이들도 즐겨 찾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산 정상에서 보는 전경도 멋지지만 일몰 때의 풍경이 압권이라고 하는데 전주에는 즐길거리가 정~말 많아서 오랜시간 그곳에 머물면서 일몰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