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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전주 여행] 한옥마을이 주는 즐거움



  전주가 이렇게나 매력적인 도시인지 처음 알게되었다. 단순히 한옥이 많다는 것 외에 별다른 생각 없이 떠난 여행이었는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먹고 보고 즐길거리가 넘쳐나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전주 풍남문(보물 제 308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이다. 전주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문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화재로 불타버렸고, 영조 44년(1768)에 전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우면서 풍남문이라 이름하였다. '풍남'이란 '풍패'의 남쪽이란 뜻이며, '풍패'란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 곳에 비유한 것이다. 성문 위에 세운 누각 윗층의 기둥이 아래층의 기둥과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도심에 자리한 단아한 성문에서 옛 전주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전동성당은 1914년 세워진 성당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손꼽힌다. 호남지방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 중 하나로 지금도 미사가 이루어진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성당답게 유럽에 있는 성당과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여행자들로 언제나 북적이는 곳이다. 이 성당이 한옥마을에 자리잡고 있어서 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는 것 같다.







 경기전(사적 제 339호) 경기전 일대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경기전을 비롯한 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이 자리 잡고 있다. 본래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많은 부속 건물을 거느린 웅장한 규모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절반의 땅을 잃고 부속 건물은 철거되었다. 이후 점차 복원하여 옛 모습의 일부나마 되찾은 경기전 경내에는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묻어두었던 태실과 그것을 기념하는 비석,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가 있다. 경내의 뒤쪽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셔둔 조경묘가 자리 잡고 있다.


해설사 안내시간 : 오전 11시, 오후 2시, 4시. 성인 입장료 1천원.


▼ (좌) 하마비 (우) 예종대왕 태실 및 비 


 경기전 하마비는 조선시대에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이 비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표석이다. 왕, 장군 또는 벼슬이 높은 유명한 성인들의 태생지나 사당 앞에 세웠으며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 이곳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이기에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이라 새겨져 있다. 경기전하마비는 1614년(과해군 6)에 세웠으며 1856년(철종 7)에 중각하였다.

 이 태실(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26호)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 둔 석실이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였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원래 선조 11년(1578)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년(1734) 다시 고쳐 세웠다. 1928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태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겼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을 덮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 연대를 앞면과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건립연대는 선조 11년(1578)이다. 잘 보존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뿔 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릿돌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서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 9)부터 1413년(태종 13)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 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 정종, 태종의 3조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는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 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3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 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과 실록의 보존(피난). 조선왕조실록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태인지방 선비 손흥록, 안의를 비롯해 무사 김홍무, 수복 한춘 등 전라도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은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고 계속해서 호남지방 침공이 예상되자 내장산을 떠나 아산으로 옮겼다. 이후 실록은 해주로 옮겨졌고 임진왜란의 전황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1595년에 실록을 강화도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실록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존하였다. 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영변부 객사를 거쳐 1603년 강화도로 옮겼다.


세초연. 실록편찬에 사용된 사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모두 없앴으며 물에 씻은 종이는 재활용하였다. 세초를 마치면 이를 축하하는 행사인 세초연을 베풀었다.


▼(우상) 임진왜란 때 실록의 피난 (우하) 세초연


 조선 태조 어진(국보 제 317호)은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이다. 경주, 평양 등지에 모셨던 이성계의 어진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리고,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기존의 낡은 어진을 태워 묻고, 서울 영희전에 있던 태조 어진을 본떠 새로 그린 것이다. 임금이 국가의 길을 할 때 차려 입는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마주잡고 의자에 앉아있는 태조의 정면 모습이다. 얼굴과 옷 주름을 처리한 음영 기법, 의자와 자리의 화려한 색채, 어깨에 그린 용의 금박 효과 등에서 어진이지만 높은 품격이 보인다. 한 왕조를 세운 인물의 위엄이 시대를 뛰어 넘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 어진박물관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 해바라기가 있는 곳 옆에 어진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경기전은 정말 멋진 곳인 것 같다. 한옥의 배치와 모습, 나무들은 그 절묘함과 아름다움이 굉장한 것 같다.




 어정은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을 말한다. 그리고 종묘(역대 여러 임금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 사직단(임금이 백성을 위하여 토신인 사와 곡식인 직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 등에서 임금이 참여하는 제례(제사)에 사용하는 우물도 어정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셨던 경주의 집경전, 평양의 영승전, 전주의 경기전 우물도 어정이라고 하였다. 어정은 깨끗하고 성스럽게 취금해야 하므로 주위에 담을 두르고 문을 설치해 두기도 한다.



 조경묘(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한은 신라 때 [사공, 도성을 쌓고 고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한 벼슬]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그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대 후손이다. 조경묘는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워졌으며, 영조가 세손(정조)으로 하여금 쓰도록 한,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봉안했다. 철종 5년(1854)에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새파란 하늘에 600년된 은행나무가 짙은 초록빛을 발한다. 그 옆에는 맛있는 빙수를 파는 한옥이!!! 저 은행나무가 샛노란 잎들을 펄럭일 때 다시 전주를 찾고 싶다!




 한옥마을을 떠나 전주의 쇼핑거리를 걷던 중 만난 풍패지관. 전주 풍패지관(보물 제 583호)은 조선초기에 세워져 전주를 찾아온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본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를 걸어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여기에 경의를 표했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이곳에서 축하 의식을 행하였다. 본관의 현판에 쓴 '풍패지관'의 '풍패'는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지명으로, 조선 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비유한 말이다. 전주 풍패지관(객사)에는 본래 좌우에 날래채가 딸린 본관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있었다. 최근 동쪽 날개채를 복원하여 본관은 옛모습을 일부나마 되찾았으며, 경내에는 풍패지관(객사)을 지키던 수직사가 남아있다. 지금은 열린 공간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옥마을 둘레길을 걷기 전 든든하게 배를 채우기 위해서 남부 시장에 들렀다. 물론 한옥마을 안에도 맛집으로 소문난 곳들이 많지만 피순대를 본 순간 이건 전주가 아니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당장 남부시장으로 향했다. 나부시장은 한옥마을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듣던대로 피순대는 정말 맛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