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거제 여행] 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 거제에서 태어나 대통령이 된 한 남자에 대한 기록



 거제 여행을 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거제 출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게다가 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퇴임 후에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에 비해서 김영삼 대통령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인물이든 공과 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영삼 대통령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만 과연 그것이 그의 잘못이었을까 싶은 것까지 단지 그의 재임시간에 일어났다는 것만으로 그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와 90년대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좋은 시간이었다.


http://www.kysarchives.or.kr/

관람시간 09:00 ~ 18:00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55-634-0303

주소     경남 거제시 옥포대첩로 743



 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은 생가가 옆에 위치하고 그곳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전 생애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기에 어린시절부터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제 말에는 중학생들도 군사훈련과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사천비행장 노역에 동원된 그는 한국인을 멸시하던 일본인 반장을 실컷 두들겨 패주었고 한다. 그 후 정학 통지서를 받아 집안이 발칵 뒤집혔으나, 곧 해방이 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가 그가 대통령이 되고나니 영웅담(?)처럼 기록되어진다. 어렸을 때 이미 소년 김영삼은 대통령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꿈은 수십년이 지나면서도 굳건했다. 아마 적당히 권력과 부를 가지 사람이 되고자 했다면 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 같다. 회유되고 포기하기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굉장히 잘 꾸며놓았다. 단순히 정보들을 잔뜩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흥미롭게 김영삼 대통령의 삶과 그가 지나온 시대를 방문객들이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만들어 놓았다.




 부마항쟁.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 사태를 계기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0월 16일, "유신철폐", "독재타도", "김영삼 총재 제명철회"를 외치는 5만명의 시위대가 부산시청 인근을 가득 메웠다. 시위는 곧 마산 등 경남 일원으로 확산되었다. 정권은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해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지만 항쟁은 더욱 격렬해져 갔다. 10월 26일, 박정희는 대량 유혈사태를 우려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유신의 몰락이었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국가적 가장 큰 사건은 IMF다. 이미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을 때가 그 전의 사건들은 그저 책 속의 이야기로 다가왔을 뿐이다. 그 과거이 사건들 중심이 김영삼 대통령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 보다. 




 민주회복의 열기 속에 김영삼 총재가 복귀하자 박정희 정권은 가혹한 탄압을 가한다. YH 여공의 신민당사 농성을 폭력 진압하고 총재 직무를 정지시킨 데 이어, 사상 초유의 국회의원직 제명사태에 이른다. 김영삼 총재는 "민주회복을 위한 나의 소신은 축출할 수 없으며, 공화당 정권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마침내 부마항쟁의 와중에 10.26사건으로 박정희 독재는 막을 내린다.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박종철 사건과 4.13 조치에 분노한 국민들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주도하에 호헌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6월 10일부터 전국에서 약 500만명 이상이 참가했고 한때 군부 개입에 대한 우려도 있었으마, 마침내 이른바 6.29 선언을 일단락되었다. 국민운동본부 결성을 주도한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명예혁명으로 규정했다.




 1983년 5월 18일, 가택연금 중이던 김영삼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생명을 건 무기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그의 투쟁은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으며, 실의에 빠졌던 민주화 세력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정권의 회유를 뿌리치고 단식은 23일간 계속되었다. 목숨을 건 그의 단식은 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원동력이 되었다.





 최연소 국회의원에서 아홉번이나 국회의원을 거쳐서 그는 결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 IMF 사태가 일어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랐다. 그리고 그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사실 그가 대통령이 되지 전 세대에 쌓인 부패와 경제 문제가 그의 재임기간에 터진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일찍 터져서 빠르게 수습하고 부조리한 구조를 제대로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부여메고 있다가 더 이상 수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아르헨티나처럼 디폴트라고 선언했다면 지금의 아르헨티나처럼 디폴트를 반복하는 신뢰도 제로의 국가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 않을까?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1372번지는 김영삼 대통령(재임 1993~1998)이 태어난 곳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1928년 12월 4일(음력) 이 집에서 태어나 장목초등학교를 다녔고, 서울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1년도에 이화여자대학교 3학년이던 동갑 손명순 여사와 결혼하여 이 집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1954년 거제에서 전국 최연소인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40여년동안 민주화 투쟁을 이끌면서 국회의원 9선을 거쳤고, 1993년 32년 만에 이 나라에 문민정부를 출범시켰으며, 1998년 대통령에서 퇴임하기까지 평생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였다. 1893년 목조기와 건물 5동으로 세워진 생가는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전체가 심하게 노후되어 전면적인 정비가 시급했다. 그러던 중 2000년 8월 김영삼 대통령 부친 고 김홍조옹이 대지와 건물 일체를 거제시에 기증하였고 거제시가 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존하기 위해 2001년 5월 9일 현재의 모습으로 증건하였다. 본채의 상량문은 김영삼 대통령의 친필이며 생가에서 바라보이는 왼쪽 산 능선에 부친 고 김홍조옹과 모친 고 박부연 여사의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