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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거제 여행]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이 들러야 할 한 곳이 있다면 그 곳은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라고 생각한다. 거제를 대표하는 관광지이며 거제에서만 만나게 되는 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전국의 많은 지자체들이 비슷한 박물관과 전시관, 관광지를 운영하지만 거제 포로수용소만은 절대 모방할 수 없다. 이곳이 한국전쟁 당시 17만 3천명까지 전쟁 포로를 수용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미 6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향해 총구를 향하고 있다. 전 국토가 전쟁터였기에 우리나라에서 6.25 관련 유적이 남아있지 않은 곳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독특한 유적지가 남아 있는 곳은 거제 밖에 없을 것이다.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들어섰다가 이곳을 나갈 때는 무거운 마음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가게 된다. 상단의 사진은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의 한 부분이다. 국내 최초, 세계 최대의 단일 디오라마관으로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배치 및 포로의 생활 모습 등을 고증을 거쳐 한눈에 볼 수 있게 재현하였다.


http://www.pow.or.kr/

운영시간   9:00 ~ 17:00 (하절기 18시까지)

휴관일     추석, 설날 당일. 1,2,3,6,9,10,11,12월 네번째 월요일

입장료     어른 4500원, 청소년/군인 3천원, 어린이 1500원

* 체험시설은 별도 비용을 지불해야 함





 본격적으로 포로수용소로 들어가기전에 작은 공원이 있다. 흥남철수작전 기념비메레디스 빅토리호가 재현되어있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2월 24일 흥남부두에서 민간인 10만명을 성공적으로 탈출시켜 거제도로 후송하여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인도주의적인 작전으로 평가받는 흥남철수작전의 뜻을 되새기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내에 기념비를 2005년 5월 27일 건립하였다.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기적의 배'로 불리었는데 세계역사상 유래없는 1만 4천명의 피난민을 태워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한때 퇴역했다가 월남전에 다시 동원되어 임무를 다한 후, 고철로 팔려 중국의 어느 항구에서 1996년 해체되었다고 한다.






 탱크전시관은 거대한 탱크 모형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이 대형탱크는 북한국이 남침을 감행할 때 그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탱크이다.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한국전쟁을 움직였던 역사의 인물들을 여기에서 만날 수 있다. 중국 근현대사 수업을 듣고 중국 여행을 해서인지 유엔군쪽에 있는 인물들보다 중공군쪽에 있는 인물들의 이름이 더 친숙했다.






 관리의 효율성이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많은 포로를 한 곳에 모아놓을 생각을 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 같다. 이 포로들만으로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만큼 포로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만큼이나 생각도 달라서 이 포로수용소 안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수시로 벌어지고는 했다. 우리는 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수 없었을까? 결국은 모두가 행복한 방법이 무엇일까를 두고 다른 생각을 가졌을 뿐이잖아요. 순전히 자기 욕심 때문에 전쟁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적어도 이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욕심을 낸다고 무엇가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휴전과 함께 송환희망포로의 북송이 마무리 되었으며,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드디어 석방되어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전에 1953년 6월 18일부터 20일까지  이승만대통령의 독자적 지시로 반공포로의 석방 단행하기도 했다. 제네바 협정의 내용 중에 '전쟁포로는 그들을 관리하는 국가의 주권에 속한다'는 규정 발견하고 이를 '한국의 주권에 속할 수도 있다'라고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여 석방을 합법화시킨 것이다. 이때 한국군 경비의 묵인과 협조 하에 반공포로 탈출하였다. (총 반공포로 수용인원 35,698명 중 27,388명 석방).

 공산군 포로 22,604명(중공군 14,704명 및 북한군 7,900명) 그리고 국군, 유엔군 포로 359명 등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휴전협정에 따라 120일간 비무장지대내애서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보호와 관리하에 양국가의 관리자로부터 설득을 시작하려 했으마, 공산측의 지연으로 30일이 지난 후 설득이 시작되어 1953년 12월 23일 그 시한이 마감되었다. 판문점에서 송환희망 포로의 교환이 신속히 이루어졌지만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에게는 자유의 몸이 되기위해서 본국의 집요한 귀환 압박에 강력히 맞서야 할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포로수용소에는 10만이 넘는 포로들이 있었고 사실 그들 모두가 사회주의가 모두의 행복을 달성하는 최고의 정치체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이 사는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휘말려 군인이 된 것 뿐이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가족과 함께 굶지 않고 살면 그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포로였지만 그들 사이에는 이념적 마찰이 날로 증폭되어 급기야 포로간의 처절한 학살과 폭동으로 이어졌다.


 1952년 4월 휴전협정 진행 중 공산군 포로의 반 이상이 송환거부 의사를 밝히자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인 '남일'이 거제도 포로 수용소 친공계 총지휘자 '박상현'에게 비밀지령 하달했다. 비밀지령의 내용은 공산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의 어떠한 심사시도나 분리수용기도에 대해서도 죽음으로써 저지하고  유엔군 당국으로부터 심사기도를 중단케 하는 보장을 받아내기 위한 흥정물을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미군 장교 중 가능한 한 고위장교를 납치하여 인질로 삼으라는 내용도 있었다. 결국 이 비밀지령으로 인해 돗드준장 납치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2월 20일, 수용소 11대 소장으로 돗드준장 부임

5월 7일, 제 76포로수용소 대변인이 돗드준장과의 면회 요청

            독드준장은 전속부관인 레이븐 중령만 데리고 수용소 비상문에서 포로대변인과 면담

            신호에 따라 포로 20여명이 돗드준장을 수용소 내로 납치

            제 76포로수용소 내에서 포로대표단 결단식 거행, 미국의 만행 인정, 포로 전원송환 등을 요구

5월 8일, 돗드준장 후임으로 콜슨준장 부임

            당시 유엔군 사령관 릿지웨이 대장은 사건수습을 위해 강경대응을 명령했으나 펜플리트 미 제8군사령관과 콜슨준장은 강경책이 휴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 협상 진행

5월 9일, 돗드준장이 공산포로에 굴복, 거짓자백서에 서명

5월 10일, 콜슨준장, 포로측 요구를 다소 수정한 최후 서명에 서명.  돗드준장 석방

결과 - 돗드 및 콜슨준장을 대령으로 강등, 5월 12일 보트너 준장을 새 수용소장으로 임명과 포로 관리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미국의 위신 추락. 교섭 과정에서 작성된 소위 '콜슨문서'가 휴전최담에서 공산측의 무기로 악용되어 유엔측에 상당히 불리한 영향 미침.





남자 위주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일부 여자포로들도 생포되어 수용되었으며 그들도 남자포로와 동일한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은 규모가 굉장히 크다. 사실 이곳을 상징하는 폐허가 된 수용소 건물 사진만 보았던 내게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작년에도 1950관, 평화파크, 아바타 포 등이 유적공원 내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이 곳의 역사적 중요성만큼이나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작은 전시관들도 참 많다. 포로사상대립관은 포로수용소내의 포로들이 점차 조직화되어 진공포로와 반공포로로 갈라진 채 사상대립 양상을 띄게 되었으며 갈등과 증오가 이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으로 온 포로들은 전쟁 중 사로 잡힌 인민군과 중공군들로 LST에 승선하여 해상을 통해 거제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전쟁 포로의 신분으로 수용소 생활을 시작하였다.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당시 국군들이 쓰고 있던 철모에 뚫린 총탄자국은 전쟁의 처참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철조망을 걷어내는 국군과 북한군의 모습은 한 민족간의 화합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내에서는 포로들간의 친공, 반공 이념대립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참하게 살해 되었다. 이 위령탑은 당시 친공, 반공간의 이념 대립에서 희생된 2000여명 반공포로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아쉬운 것은 이 위령탑이 반공포로만을 위해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노예제가 당연했던 것처럼 어쩌면 당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사회주의가 이렇게 불합리한 사회의 모습을 보이고 결국 몰락할 지 누가 알았겠는가. 결국은 공동체가 함께 잘 살고자 했던 하나의 이념이었을 뿐인데. 결국 그들도 희생자이지 않을까...



▼ (좌) 전쟁, 분단 그리고 화합 조각상  (우) 위령탑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은 규정된 통제와 규율 속에서도 제네바 협정에 의거 자율적인 내무생활이 상당부분 허용되었다. 포로 수용소를 재현해 둔 곳은 포로막사 체험캠프 교육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어서 학생들이 단체로 수련회 형식으로 오기도 하는 것 같다.




 한국전쟁 중 대동강철교의 모습이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다시 후퇴하게 되자 피난민들은 폭파된 평양의 대동강 철교를 타고 자유를 향해 처절하고 험난한 피난의 길에 올랐다.





 평화파크는 매년 8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는 거제 포로수용소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학습형 테마파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만들어졌다. 평화미래전시관, 4DFX영화관, 어린이 평화정원, 평화수호대, 평화탐험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부 시설은 유료시설이다.







 지난해 지어진 전시관인만큼 외부와 내부 모두 세련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화면과 종이 나무의 평화를 위한 소원을 적을 수 있다. 나도 그 바람들에 작은 소원을 하나 얻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가장 먼저 볼 줄 알았던 폐허간 된 포로수용소의 모습은 출구로 나가는 길에 있어서 가장 마지막에 보게 되었다. 이 곳은 당시 미군 경비병들이 사용하던 P.X(군인 매점)의 자리이며 바닥이 둥글게 콘크리트로 포장된 부분이 무도장이다. P.X에서  음식물과 주류를 구입하여 무도장에서 먹고 즐기면서 이국에서의 향수를 달래며 여흥을 즐겼다.


 당시 포로들의 경비를 담당하던 경비대장의 집무실로써 건물 좌측이 벽난로, 건물 정면 우측이 화장실이다. 포로수용소가 폐쇄(1953년 7월 27일)된 후 학교 선생님이 막사 벽면에 당시 포로들의 생활상을 벽화로 그렸으나 지금은 퇴색되어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있다.





본 유적지 미로체험은 현재 남아있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유적지 잔해를 이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그 역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거제도의 대표 관광지이자 칠천량 해전공원과 함께 거제도의 대표적인 다크투어리즘 장소이다. 시기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고 이미지들이 워낙 강렬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포로수용소에서 보았던 이미지들이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거제 포로수용소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