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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부산 동구 곳곳을 누벼라] 걸을수록 즐거워지는 초량이바구길



 부산을 대표하는 걷는 길은 아마도 갈맷길일 것이다. 부산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걷는 길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간별로 걸어도 되지만 총 길이가 300km 가까이 되다보니 그 방대함이 여행자를 압도해 오기도 한다. 부산에는 갈맷길이 아니어도 걷기 좋은 길이 많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부산 동구에 있다. 부산역에서 길만 건너면 바로 시작되는 초량이바구길이다. 부산역 앞에 있어 접근성이 좋고 소요거리가 1.5km에 불과한데다가 그 거리마저도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가 가득차 있다. 부산 동구에는 초량 이바구길 외에도 호랭이 이바구길, 부산이바구길이 있다. 초량은 길이 조성된 동네 이름이다. 이바구는 이야기를 의미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즉 이야기가 있는 길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부산 동구는 격변하던 근대의 한반도를 보여주던 곳 중 하나로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초량 이바구길을 걷다보면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만나게 된다. 

 


부산 동구 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tour.bsdonggu.go.kr/

이바구길 소개                     http://tour.bsdonggu.go.kr/rbs2/modules/board/view.php?rbsIdx=UR_15_47&category=12&idx=19


부산 동구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 이바구길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서 주변맛집과 숙박까지 구체적이 정보들이 모두 담겨있으니 초량이바구길을 걷기 전 방문하면 좋다.




 초량 이바구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옛 백제병이다. 한 눈에도 오래된 건물임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90년이 넘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1922년 일본 오카야마의전 출신인 명지(강서구)사람 재일동포 최용해가 건립한 서양식 지하1층 지상 5층건물로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인 백제병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1932년 병원이 문을 닫고 난 뒤 건물의 주인은 부산의 역사와 함께 변해왔다. 봉래각이란 중국요리집에서 일본 아까즈끼부대의 장교 숙소를 거쳐 해방 뒤 치안대사무소,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1953년에는 신세계 예식장으로 운영되다 1972년 화재로 건물 내 일부를 태웠으며 이후 5층 부분이 철거되고 현재 4층 일반상가로 유지되고 있다.




 남선창고터는 옛백제병원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말 그대로 '터'이기 때문에 못 보고 지나치기 쉽다. 남선창고터를 찾을 생각하지 말고 탑마트 주차장을 찾으면 된다. 주차장 한쪽에 남선창고의 벽이 서 있다.  1910년 부산상인 정치국을 중심으로 부산 최초로 1천여평이 되는 해산물 보관 창고를 세웠다. 처음엔 '회흥사'로 불리다 이후 북선창고 또는 명태고방이라 불렀다. 이 창고는 1천평이나 되는 떡논 넓은 대지에 붉은 벽돌로 벽을 두르고 서까래와 기둥들은 나무를 써서 지은 부산 최초의 창고였다. 내부는 통칸으로 배수구 시설 등이 완벽하게 되어있고, 온도가 항상 일정해 바깥 기온과 무관했다. 함경도의 특산물인 명태를 비롯하여 해산물을 해상으로 통하여 선박으로 부산항까지 운송해 와서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여 경상도와 충청도 등 각 지방으로 보급했다. 1914년 8월 경원철도가 개통되면서 서울 가는 화물이 부산을 경유할 필요가 없게 되자 물주들은 원산으로 돌아가 그곳에 북선창고를 세웠다. 함경도에 돌아가지 않은 이병진 오남근 등이 떠난 사람들의 주식을 양도받아 남선창고주식회사를 창립해 부산의 북선창고를 남선창고로 개명했다. 명태고방이 생긱 후부터 해반직전까지 이 창고에는 명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명태를 시작으로 화공약품, 합판, 신발, 러시아 상인의 집 등 부산경제의 흐름을 묵묵히 껴안고 있는 공간이었고 은행과 주요 상거래에 그대로 통용되는 국내 최초의 창고증권을 발행한 곳이기도 했지만 2009년 4월에 완전히 철거되어 현재 붉은 적벽돌로 쌓은 담장만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제 좁은 본격적으로 좁은 골목길들로 이어지는 초량이바구길을 걷게 된다. 곳곳에 표시가 잘 되어있어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갈 수 있다.





  담장갤러리는 부산 동구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과 글 등을 만나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동구의 산복도로에서만 느낄 수 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풍경과 시를 전시하여 흑백사진과 같은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구부러진 골목 - 산복도로. 76


사람 하나 겨우 빠져 나가는 샛골목은

어찌 보면 질러가는 길 같으면서도

몇 번을 아프게 굽이쳐 돌고 난 뒤에야

처음 길과 만났다 늙은 골목은

갈라졌다 다시 만나는 일로 환해지지만

담벽에 해를 그린 아이들이 떠난 뒤

구부정해지는 줄도 모르고 허허대며

숨어 간 뒤에는 걸핏하면 나오지 않았다

                               -강영환-





자주 걷는 길 - 산복도로. 100


아침저녁 걸었어도 물리지 않던 길

북항을 툭 터서 가슴 높이로 보여 주었고

멧비둘기 머리 위로 가끔 지나

까치 노래에 배시시 웃음 띠던 출근길

오륙도 동 터 오는 아침을 만나며

두 다시를 받들어 너를 걸었다

-강영환-





 담장 갤러리는 한 곳이 아니라 여러곳에 걸쳐서 다양한 주제로 이어진다.




동구 인물사 담장 갤러리에서는 부산 동구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해주고 그와 관련된 장소가 있으면 지도에 함께 표시를 해 두어서 그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면 바로 그곳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은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생에 대한 진지한 의지를 표현한 시인으로 경남여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부산고 교가를 작사하였으며,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운명하는 등 동구와 깊은 인연을 가졌다.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독립운동가 소해 장건상(1882~1974)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외교활동을 수행하고 의열당, 국민대표회의, 민족혁명당 등 다양한 독립운동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1950년 5월에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옥중 당선되기도 했다.


의사 장기려(1911~1995)선생이 1968년 초량동 복음병원분원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한 것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행려병자의 아버지, 의료보험의 효시, '청십자조합' 창설자, 무소유와 무욕의 삶, 시대의 성자, 국내 최초 간 대량 절제술 성공, 참 의사이자 참 스승, 한국의 슈바이처...... 이 모든 수식어로도 부족한 사람이 성산 장기려 박사라고 한다. 초량 이바구길 위에 장기려박사 기념관 [더 나눔]이 자리하고 있으니 곧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박재혁은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출생으로 27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간 의열 청년이다. 고교시절 항일단체인 '구세단'을 결성 활동하였고, 26세이던 1920년 9월 14일중국 고서상인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사망케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고 옥중 단식하다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0대의 나이에 항일단체를 조직하고 27세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 혼돈의 시기에 태어났기 때문에 일찍 성숙한 것일까. 아니, 성숙한 인간이라고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다. 그는 정말 용감한 사람이었나보다.





 초량초등학교 앞에도 담장 갤러리가 있는데 초량초등학교를 나온 유명인들에 대한 내용들이 걸려있다. 초량초등학교는 1937년 4월 10일 부산초량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는데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학교이며 유명한 졸업생으로 가수 나훈아, 개그맨 이경규, 음악감독 박칼린 등이 대표적이다.





동구의 역사를 담고 있는 [동구 초량의 삶과 마주보기]가 마지막 담장 갤러리다. 1876년 부산항 개항에서부터 1884년 청관거리, 1892년 초량교회설립, 2000년 북항재개발시작, 2011년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착공까지 부산 동구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초량 이바구길을 걷다보면 산복도로 르네상스와 관련된 건물들을 종종 보게 된다. 산복도로 르네상스는 부산시가 2010년부터 서민주거환경 개선과 마을공동체 회복 등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사업니다. 마을 거점이라고 표시되어있는 곳에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초량이바구길 168계단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산복도로 르네상스 5지구 마을거점 이바구정거장에서는 무공해 빨래비누 한 묶음을 5천원에 판매하고 있다. 이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국수 / 비빔국수 / 수제비 2,500원  김밥 / 부침개가1,500원에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겠다. 간단하게 고픈 배를 채워주고 계단을 오를 수 있다.





 처음에는 왼쪽의 계단을 보고는 뭐, 별거 아니잖아. 168계단은 과장이었네라고 생각했다. 근데 왼쪽 계단은 168계단으로 향하는 그저 작은 계단이었을 뿐이었다. 왼쪽 계단을 올라 작은 길을 지나자 길고 긴 계단이 보였다. 계단이 시작되는 곳 왼쪽에는 우물터가 보존되고 있었는데 아직도 물이 들어있었다.





168계단을 오르다보면 오른쪽으로 김민부 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인 김민부 시인을 기리고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마음'의 시 정서를 가장 잘 음미 할 수 있는 전망대라고 한다. 김민부 시인은 1956년 부산고등학교 1학년때 시조 [석류]로 <동아일보> 신충문예에 입선하였으며 3학년 때 시 [균열]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천재시인이다. 1962년에 부산 MBC에서 [자갈치 아지매] 방송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후 서울 MBC, TBC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약하였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기다리는 마음] [은지화] [닭] [비가] [추일] 등이 있다.


석류

불타오르는 정열에

앵도라진 입술로

남몰래 숨겨온

말 못한 그리움

아 이제야 가슴 뻐개고

나를 보라 하더라

나를 보라 하더라





 김민부 전망대에서는 동구가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부산항으로 드나드는 배, 산 자락으로 알록달록 들어선 집들을 보면서 커피 한잔을 꽤 긴 시간동안 마셨다. 일출과 일몰, 야경 어느 때와도 좋을 것 같다.






 모두가 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볼 때 해바라기만은 뜨거운 햇살을 향해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해바라기의 노란색이 태양만큼 눈부시다.




 이바구 충전소는 독특한 외관이 인상적이다. 올 4월에 문을 열었는데 1층은 여행안내와 가죽, 한지 공예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온돌방 하나가 있고 2층은 도미토리와 2인실이 하나 있다. 무엇보다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부산을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염두해두면 좋을 곳이다. 이 정도 전망을 가진 숙소에 이렇게 저렴한 숙소는 없을 것 같다. 이바구길을 탐방하는 탐방객들 스스로가 새로운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의미의이바구충전소는 6.25 피난민들의 삶과 애환이 스며있던 판잣집 및 양철집을 형상화하여 조성하였으며, 초량이바구길 탐방객들의 여행안내소이자 휴식공간, 체험공간으로써 지역 어르신들의 노인일자리사업으로 추진되며 가죽공예 체험 및 완제품들을 전시·판매하는 공간을 갖추고 있다. 특히, 이바구충전소에서 바라보는 부산역, 북항대교 등 부산항의 멋진 조망을 통해 새로운 추억과 이야기 꺼리를 만들어 갈수 있는 공간이다.6.25 피난민들의 가슴 아픈 기억이 담긴 지역으로서 부산역 및 북항대교를 아우러는 부산항을 조망하면서 가죽공예 체험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이바구길 융·복합노인일자리사업의 일환으로 지역 어르신들이 관리하며, 동구 노인복지관에서 위탁운영하고 있다. 수익금은 노인일자리사업 참여어르신들의 소득창출과 사회참여활동에 쓰인다.


운영시간 :  오전 9시 ~ 오후 7시

문의 및 예약 : 동구노인복지관 (051-467-7887)

게스트하우스 : 도미토리 1인 15,000원. 1층 온돌방 4만원. 2층 작은방 3만원. 2층 큰 방 6만원.




장기려기념관 더 나눔은 의사 장기려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곳으로 장기려에 대한 전시와 작은도서관, 북카페로 이루어져있다. 장기려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초량 이바구길의 동구 인물사 담장에서 보아서 기대하게 된 곳이기도 하다. 나도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진다. EBS에서 전국 800명의 전문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우리나라 역대 명의 1위에 장기려박가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시기 주변의 이해부족과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장기려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였다.





 전시관은 크지 않지만 그의 삶과 마음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장기려 박사가 1979년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받은 메달과 상장도 볼 수 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우리나라 우료보험의 시초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1968년 동구 초량동에 창설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였던 장기려 박사는 6.25 전쟁시 피난민과 행려환자들을 위해 천막을 치고 무료진료소 복음병원을 세워 헌신 봉사하였고, 평생 집 한칸 없이 가난한 이웃에게 의료활동과 사회봉사활동을 펼쳤다.




 이바구 공작소는 세련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곳은 근대 역사와 산복도로 이야기를 수집하여 담아내는 공간으로 골목골목을 따라 근현대사를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삶이 녹아있고 그 어르신들의 소중한 기억자산을 바탕으로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계속적으로 만들어지는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전시, 강의 및 다양한 문화행사, 교육·체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지역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전시공간의 전시물들은 상설전시하는 곳과 주기적으로 바뀌는 곳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같을 때는 '청관거리에서 차이나타운까지'라는 주제하에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차이나타운이 있는 초량골목은 조선후기에는 '왜관으로 가는 골목'이었고, 개항기에는 청국조계지가 설치된 '청관거리'라고 불렸는데 이는 용두산 주위에 있었던 일본인의 왜관거리에 대응해 부르는 말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지나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하여 '시나마찌'라고 불렸고, 해방후 다시 청관거리라고 불리다가 1953년 11월 27일 중앙동에 있던 부산역이 대화재로 인해 없어지고, 기차역이 초량동 청관거리 맞은편으로 옮겨오면서 청관거리가 신흥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일대에 미군을 대상으로 한 유흥업소와 점포가 들어서면서 '텍사스거리'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에는 러시아인들이 몰려 오면서 '외국인 쇼핑거리'가 되었고, 다시 한중국교 정상화 이후 '상해거리'가 만들어지고 2007년 '차이나타운특구'로 지정되는 등 역사적 추이에 따라 대단히 역동적인 변천의 역사를 겪어왔다. 초량 차이나타운의 지리적 위치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고, 보통 지역공동체는 거의 변화가 없는 정체된 형태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초량 차이나타운은 개항기 청관거리에서 시작해 시나마찌를 거쳐 해방 후 미군의 텍사스거리, 러시아인의 외국인 쇼핑거리, 상해거리, 차이나타운까지 변신을 거듭하며 다문화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흥미롭다.





창 밖으로 이런 풍경이 보이는 집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ㅋ





 이바구 공작소를 나와 산복도로를 걷다보니 팔남매의 단칸방이라는 게스트하우스 표시가 보였다. 초량이바구길 안내 브로셔에는 설명이 없는 곳이어서 산복도로에서 벗어나 골목길을 올라갔다. 게스트하우스라고 해서 이바구충전소 같은 곳일 거라고 기대했는데 단촐한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산복도로 사람들의 삶의 찍은 사진들을 전시 놓은 산복도로 갤러리도 지나간다.






 엄청난 생명력으로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는 나무 뿌리!!! 가파른 산비탈에 하나씩 집을 짓고 살아온 이곳 사람들의  삶을 향한 의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버스정류장이 내게 고백을 했다. ㅋ





산복도로와 면해 있는 주택과 빌라는 옥상을 주차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정말 멋진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밤에 와도 멋질 것 같다. 이 정도 풍경을 매일 볼 수 있다면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조금의 불편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멀리 버스 정류장 위에 작은 우체통이 보인다. 유치환의 우체통에 거의 다 왔다는 의미다. 





 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재밌게도 그 편지는 1년 뒤에 도착하게 된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유치환 우체통에 기대 앉아 끄적끄적 1년 뒤의 내게 편지를 쓴다. 그 때쯤이면 정신 좀 차리고 살려나? 





산복도로에서 가장 전망이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유치환의 우체통은 경남여고 교장을 역임하고 이곳에 살다 좌천동 대로변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근대문학사의 거목이자 부산을 사랑한 청마 유치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유치환의 우체통은 1층 야외공연장과 2층 시인의 방, 3층 전망대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의 사진기 옵티큐라를 닮은 건축물로 산복도로의 풍경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명소이자 회화전, 북콘서트 등이 개최되는 문화 커뮤니티 공간이다. 



 까꼬막에 도착하면 아쉽게도 초량 이바구길이 끝이 난다. 까꼬막은 산비탈을 의미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전쟁 피난민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판잣집을 형상화 했다. 휴식 공간으로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는 종합체험센터로, 지역주민이 직접 운영하며 마을기업 제품들도 함께 전시․판매하고 있다. 초량 이바구길의 모든 장소가 그렇듯이 이 곳도 전망이 좋다. 게다가 이곳은 게스트하우스로도 운영된다고 한다. 20미터 떨어진 곳에 까꼬막 카페(평일 11시~19시 운영)도 운영된다.

문 의 처 : 070-7333-9195



초량 이바구길 걷기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초량돼지갈비골목에 들렸다. 초량 이바구길 걷기의 마지막은 초량돼지갈비로 마무리해야 함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 이 곳은 오래전부터 돼지갈비만을 전문으로 취급해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갈비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60년대 부두 노동자들이 비싼 소고기 보다는 돼지고기에 술을 먹으면서 돼지고기집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돼지국밥과 수육을 팔던 골목은 점점 돼지갈비로 바뀌어갔다고 한다.





 불백 6,500원인데 굉장히 푸짐하다. 사진에는 짤렸지만 옆에 쌈도 있다. 쌈에 싸서 정말 배불리 먹었다. 초량 이바구길도 잘 걷고 초량 불백으로 마무리까지 하니 뿌듯한 여행을 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