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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김해 여행] 봉황동유적,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와 패총


 김해봉황동유적(사적 제2호) 금관가야의 생활 유적지인 김해 봉황동 유적과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덤을 총칭해서 봉황동 일대의 유적지를 일컫는다. 수로왕릉역 바로 앞에 있어서 수로왕릉역에서 수로왕릉을 오가는 사이에 가면 좋다. 조개무덤은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서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 왕망시대(AD 8~23)의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상황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또한 구릉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 바위 등이 남아 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봉황대유적지에 조성되어있는 봉황대공원에 복원된 기마무사상은 국보 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토기와 가야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참고하여 청동주물로 제작한 것이다. 복원된 기마무사상은 창을 든 무사뿐만 아니라 말에도 철제 투구와 갑옷을 입혀 보호하고 있어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함께 웅변해 주고 있다. 또 화려한 금동제의 말장식과 섬세한 말갖춤새는 가야 기마 무사의 위상과 고도로 발달한 가야문화를 모두 상징하고 있다.


▼ 기마무사상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 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 용도의 건축물이 많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체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상가옥



▼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


 여기에 세워진 망루는 가야시대 당시의 건축기술과 구조를 고려하여 추정 복원한 것으로 높이는 약 10미터다. 망루는 주변을 효율적으로 관찰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로서 외부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의 일종이다. 이러한 망루는 청동기 시대의 취락유적에서도 많이 확인되고 있으며 가야시대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봉황유적은 금관가야의 도성유적으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 선박의 진출입과 외적의 침입을 관찰 감시하기 위해 어느 곳보다 많은 망루를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해반천변의 발굴에서 줄지어 지은 대형 기둥구멍들이 확인된 데에서 알 수 있다.


봉황동공원 인근에 사는 김해 시민들에게 이곳은 산책코스이므로 곳곳을 잘 알지만 여행자들의 경우 대개 패총전시관과 복원해 둔 가야 거주지등만을 보고 간다. 하지만 낮은 산을 오르면 황세바위와 2천년 가야 사람들도 걸었을 것 같은 길들이 나오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봉황대공원의 낮은 산을 오르는 산책을 해보는 것도 추천한다.


▼ 망루(좌) 


▼ 봉황대공원에 올라 경전철 방향이 아닌 반대방향을 보면 맞은편에 보이는 산 꼭대기에 분산성이 보인다.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숙왕)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이다. 황정승과 친구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시키기로 약속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는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날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제의하자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이 시합을 한 곳이 바로 황세바위다.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는 할 수 없이 자기가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 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여의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며 죽었다.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며 병을 얻어 그해에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다.


▼ 황세바위




 김해 봉황동(회현리)패총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봉황대 구릉의 동남단에 위치한다. 봉황대 구릉 상부에 위치한 패총은 비교적 정연한 층위 상태를 보이지만 이 부분의 패총은 여러 시기의 문화층이 뒤섞여 있다. 아마도 비, 바람 등의 자연적 여건과 골짜기로 연결된 급경사면에 위치한 지형적 조건 때문에 반복적으로 층위가 뒤집히는 현상이 생긴 것 같다. 출토유물을 통해 살펴볼 때 대체로 기원전후한 시기부터 4세기 대에 걸쳐 형성된 패총이지만 이러한 여건상 하나의 층위에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뒤섞여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패총에서는 당시 생활 및 문화활동에 사용했던 토기(주로 취사용), 골각패제품(복골, 골촉, 침, 소형칼자루, 장신구 등), 국제교류와 관련된 중국계유물(화천, 청동경), 일본계유물(야요이토기, 하지키)등 다양한 인공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식생활과 관련한 탄화미, 동물뼈(상어, 돔, 고래, 거북, 기러기, 오리, 꿩, 닭, 멧돼지, 사슴, 노루, 개, 소, 말 등), 패각(굴, 꼬막, 담치, 홍합, 소라, 고동, 백합, 다슬기) 등 다양한 자연유물도 같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 풍습과 자연환경 등의 해명에 중요한 근거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 봉황동유적 패총전시관



▼ 봉황동 유적을 발굴했던 장소



 유적지이기도 하지만 정말 걷기 좋은 공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