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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김해 여행] 해은사, 가야에 세워진 사찰이 이어지다



분산성곽을 걸은 후에 자연스럽게 가게되는 곳이 해은사다.  해은사는 경남 김해시 어방동 964번지 분산성내 해발 330m의 정상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 14교구 범어사 말사로써 전통문화 보존지정 사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 가락국이 건국되고 7년 후 지금의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배에 불경과 파사석탑을 싣고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도착했다. 먼 바닷길에 많은 풍랑과 역경을 막아 준 바다 용왕의 은혜에 감사한 뜻으로 남쪽 황금바다를 굽어보는 만장대에 절을 세우고 해은사라고 했다. 김해의 진산인 분성 안에 가락국의 원찰로써 2천년 동안 많은 전쟁과 화재로 사라지고 복원되고를 거듭했다. 







 현재 큰 법당인 영산전은 30년 전 다시 중건되었고 그 옆 대왕각은 한국 최고의 성씨인 김해김씨 시조 김수로왕 영정과 김해 허씨 시조 허왕후의 영정이 봉안돼 모시고 있으며 현존 전해지고 있는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영정으로 해은사 영정을 바탕으로 표준 영정이 제작된 바 있다. 영정 앞에는 허왕후가 인도의 망산도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 있는데 신비한 영험이 있어 소원을 이뤄주는 돌로 전해 내려오면서 지역민들의 오랜 정신적 의지처가 되었다. 영산전 바로 뒤편 타고봉엔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실고온 탑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 그 안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멸의 적멸보탑이 봉안돼 있다. 해은사는 인도로부터 한반도에 직접 불교가 들어온 최초의 전법도량이 되었고 분산성과 함께 고대 가락국 마지막 보루성으로써 역할을 하여 역사적 의미가 깊다. 비록 해은사의 규모는 작지만 불상과 영정의 옛 모습 보존과 함께 정통으로 전해진 석존의 진신사리, 국내 최초의 파사석탑을 복원하여 봉안하고 있기에 남방 근본불교의 전통 맥을 전해주는 표본의 국가지정 전통 문화보존 사찰로서 자리하고 있다.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서 영정앞에는 허왕후가 망산도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라 불리는 영험있는 돌이 있어 지역민의 오랜 토속신앙으로서 남자에게는 재복을 여자에게는 생남을 절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전해주는 많은 영험설화를 가지고 있다.


▼ 대왕각


 파사석탑 적멸보궁의 연혁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김수로왕은 서기 42년 김해에 가락국을 세웠다고 했다. 가야는 역사 속에 800년을 왕성하게 실존 했음에도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전설과 설화로 전해질 뿐 분명치가 않다. 낙동강 하류에 자리한 김해는 가락 문화가 찬연하게 꽃 피운 옛 가락국의 수도이자 김해김씨 시조인 김수로왕의 탄생지가 된다. 가락국 7년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가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도래하여 왕후가 되고 중궁전 동편에 호계사를 건립한 다음 인도에서 모시고온 파사석탑을 안치하니 한국 최초의 절과 탑이 되었다. 그러나 파사석탑은 장구한 역사 흐름 속에서 임진왜란을 만나 사찰과 탑은 손실되고 일부만 남아있는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안타까이 여겨 허왕후 릉 앞에 이운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해은사 파사석탑 인연의 연혁을 정리해 보면 약 26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80세가 되던 해 2월 15일 열반에 드시고 다비식을 봉행한 후 진신사리를 남겼는데 이때 남긴 불사리를 사부대중들은 천상과 인간 세상 8곳에 골고루 나누어 탑을 노성하여 모셨다고 기록돼 있다. 그 후 300년이 지나 인도 마우리 왕조 아쇼카왕이 인도 천하를 통일 하고나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너무 흠앙하여 석존의 진신사리를 다시 재분배하여 일천사원과 일천사리탑을 세우고 받들어 모셨다. 

▼ 파사석탑 적멸보궁



그때 중국 송나라에도 아쇼카왕 당시 그 영향으로 불사리탑이 조성되어 석존의 불사리를 봉안하고 있었는데 마침 절에 대시회가 있어 탑안에 고이 모셨던 사리를 꺼내어 목욕을 시키고 친견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한비구승이 애써 기도를 봉행하고 그중 수십과를 얻어 많은 사찰에 사리탑을 조성케하여 뭇중생들의 복전 짓기를 발원하다가 인연이 성사되지 못하고 송나라 방자면 거사에게 불사리가 인도되었다. 방자명거사는 다시 친구 소철 거사에게 소철거사는 불심 깊은 친형 소동파로 알려진 소식거사에게 전수하였다. 소동거사는 불사리를 살아생전 부처님 대하듯 모시고 살다가 제남땅 진상원의 법태 대선사께서 13층 전탑을 쌓아놓고 불사리 인연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소중히 간직하던 불사리 일부를 봉헌하고 남은 39과는 임종시에 따르던 법제자들에게 인연이 있을 것이니 전전상전하라고 부촉하였다. 그 후 금, 원, 명대를 지나서 청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보존하여 당대의 금석문학대가이신 옹방강선생에게까지 전수 하였다. 이때 조선의 사신으로 온 젊은 추사 김정희를 보더니 반겨 맞으며 '당신은 전생에 서역에서 나와 같이 수행하던 둘 없는 도반이구려'하고는 이것은 천년이 넘게 전수되어 오는 진귀한 석존의 진신사리인데 전생의 도반인 당신에게 전수하여 조선의 불교가 다시금 꽃 피웠으면 좋겠소하며 고이 간직하고 있던 경전과 진신사리를 전해주니 소중히 받들어 모시고 돌아왔다. 





추사는 곧 바로 해남 대흥사 연파혜장선사에게 증정하니 추사 나이 25세때이며 지금으로부터 200년전 일이다. 그 후 다시 다성으로 잘 알려진 초의선사에게 전수되고 다시 그의 법손들에게 전해지면서도 불사의 인연이 닿지 못해 인연의 도래만을 기다리던 중 김해 신도회장 배석현 거사가 한일주식의 후원으로 김해 연화사에 칠층 사리탑과 해은사에 옛 파사석탑을 재현하고 진신 불사리를 구하던 중이었다. 그때 범어사 백운 대강백으로부터 이소식을 전해 듣고 해남 백화사에 주석하는 초의선사 법손인 응송 노화상을 함께 찾아뵈니 쾌히 승낙 하심으로써 3과는 연화사(옛허왕후 중궁전터)의 칠층석탑에 모시고 3과는 분성 만장대 해은사 타고봉에 모시게 된 것이다. 해은사 타고봉은 이름 그대로 쇠북을 치고 또 쳐울려 기필코 적과 마왕을 승복한다고 하는 숨어있는 보궁 중에 보궁으로써 만약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실 경우 김해에서 큰 인물이 나와 천하를 태평케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오행 도참설이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런 연유로 해서 해은사 타고봉에 적멸의 불사리탑이 봉안되게 된 것이다. 진신사리를 타고봉에 친견하고 보탑을 한 바퀴만 돌아도 현생 업장이 녹아들고 세 번 친견하고 세 바퀴를 돌면 어떤 소원도 다 이뤄진다 했다.






 시방법계에 지극히 신령스럽고 정성스러우신 산왕대신이 모셔져 있는 산신각은 김해시를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만장대 정상에 위치한 기도 도량이다. 특히나 산신각 입구 괴석은 남근을 상징 자손번창은 물론 많은 불자들의 소원 성취를 이룬 영험있는 곳이다.


▼ 산신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