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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대한민국 여행

[김해 여행] 김해읍성 북문과 김해향교



 김해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16년인 1434년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1451년에 둘레 4418척, 높이 13척, 여장 931개소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 적대 20개소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측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곳), 옹성(성문 보호를 위하여 외부에 설치한 이중성벽)을 갖춘 문 4개소, 냇물 한곳, 우물 28곳, 해자(성벽 주면의 인공하천)는 둘레 4683척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김해읍지]에 나타난 읍성 4대문의 명칭은 각각 해동문, 해서문, 진남문, 공진문으로서 북문인 공진문은 1666년 부사 이화악이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해읍성은 일제강점기에 읍성철거정책으로 철거되고 1895년 이후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현재의 김해읍성 북문은 동상동 현 위치에 성벽과 옹성 일부가 잔존하던 것을 2006년부터 2년간 전면 발굴을 하여 하부구조 및 축성기법을 조사, 분석하여 [김해부내지도] 등의 고지도류와 각종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2008년 3월 복원하였다.







 김해 가야사 누리길을 걷다가 만나게 된 김해읍성 북문은 주변의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자리잡고 있고 그 웅장한 모습에 묘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은 김해읍성인 북문인 공진문 뿐이지만 앞으로 김해읍성의 다른 문들도 하나씩 복원해 나갈거라고 한다. 그러면 이 4개의 성문 사이를 걷는 또 다른 길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 지금은 방어의 개념이 아닌 관광, 기념, 역사인식 재고와 같은 의미로 다시 복원되는 것인데 잘 관리되고 주변에 쉴 공간들도 더 만들어서 공원의 개념으로 이용된다면 자연스럽게 주민들과 함께하는 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분산성에 올라 내려다보니 그 모습이 더 명확해진다. 아쉽게도 안개가 많이 낀 날이어서 선명한 사진을 찍기는 어려웠다. 근처에 동상동 전통시장이 있다.


▼ 분산성에서 내려다본 김해읍성 북문




      김해향교



 김해향교(경남 유형문화제 217호) 역시 가야사누리길 위에 있어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다.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면서 지역사회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미풍양속을 장려할 목적으로 세워진 전통 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김해 향교는 1408년 고정(지금의 중앙여중)에 창건하였다가 그 후 화재 등으로 수차례 이전을 거쳐 1770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향교는 교육과 제례의 두 기능 영역으로 나뉜다. 유생이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과 일상생활을 하는 동서재는 교육 기능을 담당하고 공자를 비롯한 25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석전을 봉행하는 대성전과 동서무는 제례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김해 향교는 교육공간을 앞쪽에, 제례 공간을 뒤쪽에 두는 향교 건물배치의 일반적 형태인 전학후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입구에는 풍화루와 홍살문이 자리 잡고 있다.




 풍화루가 배롱나무와 어울려서 멋지다. 배롱나무는 향교에 많이 심어져 있다. 줄기의 나무껍질이 얇아 속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삿된 생각을 하지 않고 청렴하게 살겠다는 선비들이 삶의 자세를 상징하기 때문에 많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꽃말이 떠나는 벗을 그리워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묘지에 심어지고 한다는데 무덤 근처에 심어져 있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향교에서는  확실히 대부분 배롱나무를 봤던 것 같다.





김해향교 앞길에 정려각 하나가 세워져 있다. 효열각이라고 적혀있는데 '동몽교관 조봉대부' 허동엄의 효행기와 그의 부인 '영인' 안동 권씨의 순열기를 비문에 새겨 모신 곳이다. 공은 분성인이며 죽암 선생의 6대손이다. 허림 공의 외아들로 5살 때 부친을 여의고 조모를 어릴때부터 공경의 도리를 알아 효심이 지극하여 주변의 귀감이 되었다. 조모의 병환에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조모상을 당함에 공은 애통함과 죄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여 5일동안 보리가루로 연명하였고 3년동안 죽만 마셨다. 이어 어머니마저 열병으로 돌아가시니 산골에 여막을 지었더니 초종날 저녁에 큰 범이 와서 사흘 밤을 지키다가 시신이 돌아가는 날 동구 밖까지 호송하고 돌아갔다. 20리 밖에 있는 조모와 어머니 산소에 날마다 성묘하여 6년을 하루 같이 하였다. 연이은 상으로 얻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1774년 34세에 돌아가셨다. 공의 부인 안동 권씨는 부군의 상을 당하여 겨우 시신의 수습을 마치자 부군의 옷띠로 빈소에서 목을 메었다. 순조 8년인 1808년 이 부부에게 교지로서 효자문과 열녀문을 내려 정려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