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코끼리에 관한 오해

 

 상징을 해석하는 즐거움, 코끼리에 관한 오해

 

 

 코끼리에 관한 오해... 우리는 코끼리에 대해 어떤 오해가 하고 있는 걸까? 연극을 보기 전에 생각해 보았다. 코끼리는 포악하고 밀림을 파괴하는 동물의 대표이며 엄청난 양의 건초를 먹고 먹은 만큼 엄청난 분뇨를 한다. 상아로 인해 학살 당하기도 하고 멋진 사진 속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뭐 이건 내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인데 이 중에 오해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우선 이 연극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포스터때문이었다. 포스터 정말 멋지지 않은가! 게다가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하니 믿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동숭아트센터에서 공연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들어가보는 극장의 느낌을 받았다. 너무 자주 그 앞을 지나 다녀서 그런가 보다. 기울기가 높아서 앞 사람의 머리가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백명이 넘게 들어가는 공연장을 가득 채운사람들...) 하여간 포스터와 제목에서 오는 느낌상 오른쪽 아래 있는 사진과 같은 분위기의 연극을 생각했다. 그게 뭐냐면... 묘하고 멋진 공연. 결론은 묘하고 멋지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잘 모르겠다는 것까지 같다.

 공연이 끝난 후 떠오른 <코리끼에 관한 오해>의 코끼리는 달리의 그림에 나오는 코끼리처럼 기괴하며 세상을 몽롱하고 빙빙돌게 만드는 대상이었다. 포스터를 보면 코리끼의 다리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대신 화분을 잡으려는 하얀 손이 코끼리의 것처럼 보인다. 알고보면 집착하는 어머니와 살인마 아들은 달리의 코끼리에 의해 기이한 세상으로 빠져들어버린 희생양인 지도 모르겠다. (코끼리가 특정 인물이라고 생각들지는 않는다. 남자의 머리속 한 가운데 들어 앉아 있는 광기와는 다른 어떤 존재같이 느껴진다.)

 

 <코끼리에 관한 오해>에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2명의 젊은 여성은 커튼콜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생략). 자신을 코리끼라는 남자는 마그리트의 <사람의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가 거울 속에 나타날 때는 푸른 사과가 빨간 사과로 변한다는 것, 얼굴에 검은 복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빼면 같은 모습이다. 어머니로 등장하는 인물 또한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본 든 한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은 초반에는 유약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극이 끝난 후 내게 그의 이미지는 아래 그림과 같이 남아 있다.

극의 중반까지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중반 이후 극은 꼬이고 꼬여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진실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다락방이라는 무대에 남자가 갇혀있다. 남자는 소설을 쓴다. 쇠사슬로 잠겨 있는 문이 열리고 그의 어머니가 들어와 아들에게 소설 쓸 것을 강요하고 채찍질을 하며 약을 먹이고 세상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심어준다. 자, 여기까지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종종 보아왔던 이야기다. 자식에 대한 과보호와 아집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부모의 모습과 그 밑에서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지내는 유약한 자식의 모습 말이다. 극의 중반, 코끼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남자. 다락방 안에서 환상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이 때는 그냥 극의 재미를 덧붙여주는 요소로서 생각했지만 극이 끝난 후 생각해보면 남자의 환각(?)이 어디까지 가있는지 알 수 있다.

 

  극의 후반, 다락방은 지하방이라고 하는 문 밖의 사람. 남자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남자의 손에 목 졸려 죽기 전 ‘네 엄마는 4년 전에 죽었는데 왜 나보고 엄마라고 하니?’라고 묻는다. 그 전, 순종하던 남자가 반항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려 피를 먹이고 시체들이 가득한 물 속에서 남자를 구해내고 13살(?) 때 사람을 죽였을 때도 수년간 대신 감옥에 갔던 것이 자신이라고... 자신의 희생은 다 남자때문이라고 한다. 반전인 것이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모두 이해 할 수 있는 배경이 존재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강을 뒤덮은 시체라는 설정은 누구나 괴이하고 광적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니까말이다. 다락방인지 지하방인지 모를 그곳은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에 나오는 음악이 흐르면서 마치 문고리 안이나 지하철 선로 옆에 혹은 광화문 한가운데 지하에 있을 것만 같은 기괴한 생각이 든다.

 

 시각적인 면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색감의 대조다. 회색과 검은색 및 희색의 무채색과 붉은색의 대비가 돋보인다. 배경의 무채색의 방이다. 의자와 책상, 타자기와 (어린이용) 목마도 하얀색이다. 붉은 색은 소설이 쓰여지는 종이와 스웨터가 만들어지는 실, 여자의 붉은 입술 뿐이다. 남자는 붉은 종이에 소설을 만들어내지만 구겨버린다. 여자는 붉은 실로 스웨터를 짜지만 코가 나가 풀어버린다. 그 둘은 완성되지 않는 일을 계속 반복한다. 소설 13번째줄 스웨터 5번째 줄 2번째코... 그곳에 비밀이 있다. (농담입니다.) 여자의 첫 등장은 뜨고 있는 붉은 색 스웨터, 두 번 째 등장은 붉은 스웨터와 의자 옆에 붉은 실 뭉치, 그 후 두 개, 네 개... 붉은 실 뭉치가 늘어난다. 붉고 동그란 조명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극의 후반부로 가면서 남자의 책상 뒤 벽 붉은 색 조명의 무언인가가 나타난다. 르네의 <대화의 기술>을 조명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왜 하필 <대화의 기술>이었을까?

 

 

 여자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남자에게 투영한다. 흰 막대기를 들고 흰 목마를 내리치는데 남자는 괴로워한다. 남자에 대한 구타를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남자는 한없이 어린 아이다. 그래서 작은 스웨터를 짜고 어린이용 목마가 있는 것이다. 아...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한데 극이 전개되면서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으니...
 거미줄 조명이 남자를 옭아매는 장면도 눈에 띈다. 세상의 더러운 것을 달고 다닌다고 말하는 여자는 드레스 밑에 비닐봉지같은 것을 달고 다닌다.

 아... 이제 귀찮다. 생각하면 할수록 해석 될 여지가 많고, 달리 생각하게 될 수도 있는 면들이 많다. 상징적이고 재미있는 면들이 많아 리뷰 쓸 때 재밌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되니 짜증이 난다.

 

 

 <코리끼에 관한 오해>의 코끼리는 아래 달리의 그림에 나오는 코끼리처럼 세상을 몽롱하고 빙빙돌게 만든다.

 

  코리끼란 존재는 너무나 커서 머리에 한 번 들어오면 다른 것은 생각 할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마그리트의 <The Son of Man>을 성경식으로 말하면 ‘인자’ 즉 예수님을 뜻한다고 한다. 만약 이런 상징으로 극을 해석한다면... 다시 한 번 몽롱해진다.

 

하얀약, 나는 튼튼한 아들이 될 거예요.

노란약, 나는 행복한 아들이 될 거예요.

빨간약, 나는 멋진 소설을 쓸 거예요.

검은약, 벌레를 죽여야 돼요.

 

 이 봐요. 당신 머리에는 작은 벌레들이 우굴거리는 게 아니예요. 거대한 코끼리 한마디가 앉아 있다구요.

Posted by 가나다라마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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