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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갑완 - 황태자의 여인이었던 역사의 희생양 민갑완

민갑완

 

 역사의 희생양인 된 여인, 민갑완

 

 민갑완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이은과 약혼했습니다. 민갑완과 이은은 1897년생으로 동갑이었습니다.
민갑완이 왕세자비로 간택날 그녀는 궁중에 들어가 이은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됩니다.
당시에 이미 일본에 의해 조선은 좌지우지 하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한 상태였고 순중의 이복동생인 이은이 황태자가 된 상황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일본에 의해서 정해졌습니다. 민갑완은 초간택만 치뤄진 상태로 아직 정식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황태자 이은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데리고 갑니다.

1907년 이은과 민갑완의 나이 11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은이 일본으로 떠나버린 후 궁에서 나온 문상궁(순종의 보모)이 민갑완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져서 예를 갖출 수 없었지만 택일하여 신물을 전달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약혼지환이라고 쓰여진 곽 안에는 금가락지 두짝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황태자 이은과 민갑완은 정신으로 약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민갑완은 그저 책을 읽으며 영친왕 이은의 귀국과 혼례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궁에서 제조상궁이 민갑완의 집을 찾아와 약혼 반지를 돌려달라고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본에서 영친왕 이은 일본 황실의 공주 마사코와 정략결혼하게 되자 파혼을 종용당하게 된 것입니다. 민갑완의 집안에서는 반대하였고 실랑이는 보름간 지속되었습니다.
비록 단 한번 밖에 보지 못한 약혼자였지만 이렇게 파혼 당하면
민갑완은 다시 결혼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게 당시 사회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집 가지 못한 윗형제자매가 있으면 동생들 또한 결혼을 갈 수 없었습니다.
민갑완은 3명의 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민갑완의 집안에서는 용인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조선 왕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압력에 의한 일이었기에
보름 뒤에 약혼 반지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민갑완이 눈의 가시였기 때문에 결혼을 종용했습니다.
조선인과의 재혼이 어려울 것을 알고 일본인을 적극 추천하며 결혼하게 하려고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그 후 민갑완의 아버지 민영돈은 술병이 났는데 내의원에서 준 약을 먹고 피를 토하며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더 이상 민갑완은 조선에 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외삼촌, 동생과 함께 상해로 떠나게 됩니다.
그 뒤 계속 상해에서 지내던 민갑완은 독립 후 1946년에 귀국하게 됩니다.
28년간의 망명생활 후의 귀국이었지만 왕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민갑완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영친왕 이은이 독립한 대한민국의 권력자들의 반대로
일본에서 귀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더 자리를 잡기 힘들었습니다.
그 사이 6.25전쟁과 4.19혁명, 5.16 쿠데타를 겪으며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갑니다.

 


1963년 영친왕이 귀국하게 되어 민갑완은 다시 한번 이은은 만나고자 합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이미 의식이 없는 식물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1968년 3월 19일 민갑완은 73세의 나이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또한 희생자라 할 수 있겠지만 민갑완의 삶을 돌아보면 그녀가 역사에 희생되어 슬픈 삶을 살아야했던 여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민갑완은 평생을 영친왕 생각을 했을텐데, 영친왕은 민갑완을 기억이나 할까요?

 

 

 

 

 영친왕 이은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