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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메고 떠나다/차이나 여행기

취푸여행 공림, 공자의 무덤 그리고 10만개의 공씨 일가의 무덤


공림(孔琳)은 공자가 묻힌 무덤과 그 후 많은 공씨들이 묻힌 묘지로 이루어진 숲이다. 공씨들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는데 10만 그루의 나무들과 무덤 사이로 길이 조성되어있어서 공원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기원전 479년, 많은 제자를 혼돈의 시대에 먼저 떠나보낸 73세의 공자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노나라 도성의 북쪽 언덕에 묻혔다. 그것이 지금의 공림이다. 당시에는 봉분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묘지에 불과했으나 공묘, 공부와 마찬가지로 2500년간 공자의 위상이 황제의 권력마냥 커져가서 공림도 커져갔다. 그와 함께 공씨 일가의 무덤도 주변에 하나 둘 생겨나면서 지금은 10만개의 무덤이 존재한다. 많이 알려진대로 중국은 많은 인구로 인해 한명의 자식만을 허용하고 있다. 생명의 탄생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한해 600만명이 죽는다고 한다. 그들이 모두 봉분을 가진 무덤을 차지한다면 중국의 국토는 전부 무덤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산당 집권이후 화장을 법제화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자의 유적지 중 하나이기에 아직도 공씨 일가에게 매장을 허락하고 있다고 한다.



공림은 공부와 취푸 유스호스텔에서 2km 정도 떨어져있다. 공부에서 나오면 자연스럽게 전기차 카트(편도 10위엔, 왕복 15위엔)가 있는 곳으로 나오는데 이걸 타고 공림으로 향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물론 걸어서(30분) 가거나 버스 1번(2위엔), 삼륜택시(5위엔)을 타고 갈 수도 있다. 성곽에서 공림으로 향하는 길은 위에 보이는 사진처럼 길이 잘 닦여있어 걸어가기에 나쁘지 않다. 단지... 햇살이 꽤 강했다. 오전에 공묘와 공부를 보고 나면 점심을 성곽 안에서 먹고 오후에 공림으로 향하는 코스가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오픈. 

개별 입장료 40위엔 (콤비네이션 티켓에 포함).




아침부터 공묘와 공부를 돌아다니고 공림까지 걸어와서 걸어다니려니 너무 피곤했다. 공자의 묘를 본 후 공림을 한바퀴 걸어서 돌아보려고 했지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다. 아무도 걸어서 돌아다니지 않는다. 걷는다면 공자의 묘만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한다. 다른 곳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공묘 입구에서 Sightseeing 카트(20위엔)를 타는 것이 좋다. 주요 포인트에 내렸다 탈 수 있다. 뭐, 그래봤자 무덤이다. 2500년간 공씨 일가 중 유명했던 사람의 무덤인 것이다. 공묘는 가볍게 둘러보기로 했다.


 


공자의 묘로 향하는 길. 다리와 석상들이 서 있다. 다양한 나무들이 많은데 공자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희귀하다는 나무들을 죄다 가져다 심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곳은 무덤인 동시에 숲이다. 그래서 공림이라 불리는 것이다.


 


석상의 손을 보면 마주보고 있는 석상의 하나는 무신이고 다른 것은 무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무덤 옆에는 그의 아들 공리와 손자 공지의 무덤이 있다. 그 또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들의 무덤 또한 공자만큼 큰 무덤으로 만들어져있다. 공자는 죽어서 명성이 더 커졌지만 살아있을 때도 수 많은 사람들이 제자로 받아달라며 찾아왔던 인물이다. 그의 아들 공리 또한 공자를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다. 하지만 아들이라고 다른 제자와 달리 특별한 교육을 따로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공리는 아버지인 공자는 물론 아들인 공지에게도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공지에게는 '네 아버지는 내 아버지보다 뛰어나지 못하다'고 말하고 아버지 공자에게는 '당신의 아들은 내 아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공자의 손자 공지는 철학가로 유명했다고 쓰여있는데 공리에 대해서는 그런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그것이 사실일 지도 모르겠다.


 

공자의 무덤 앞에는 많은 꽃들이 놓여있고 절을 할 수 있도록 방석도 놓여져 있다. 비석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공자 죽은 후 그의 명성이 높아져감에 따라 그에게 내려지는 칭호도 높아져갔다. 그리고 결국 그는 '왕'이 된 것이다. 재밌는 것은 끝에 王에서 밑에 부분의 길이를 늘려서 밑받침을 앞에 돌에 교묘하게 안보이게 해서 干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건 황제와 왕족들이 공자의 무덤을 찾았을 때 노여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공자의 무덤 옆에는 건물이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관리소 같은 것으로 활용되는 것 같은데 본래 공자의 제자가 시묘살이를 했던 곳이다. 공자의 제자 지공(520BC-456BC)은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이 한이 되었는지 다른 제자들인 3년의 시묘살이 끝내고 떠날 때 그는 3년을 더 있어 총 6년간 공자의 묘 옆에 머물렀다. 이에 대한 설명이 써 있는 표지판에 위의 사실을 써놓고는 지공의 사례가 존경하는 스승을 대하는 좋은 예라고 적혀있었다. 아... 지공의 시묘살이를 예로 든다면 세상에는 스승을 존경하는 사람은 열명도 안될거야.



 

수 많은 무덤들은 작은 봉분 형태로 되어있는데 비석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공자묘를 나와 걸어갈 수 있을만한 곳에 명나라 무덤 그룹군이 있어서 찾아갔다. 공자의 55대손에서 65대손들이 묻힌 곳인데 봉분 외에도 석조들이 많아서 눈에 띄는 곳이었다. 성이 공씨라고 해서 공림이 다 묻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씨 커뮤니티에 도움이 된 사람들만 묻힐 수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당연하게 공씨지만 결혼해서 출가외인에 되면 어떠한 경우에도 공림에 묻힐 수 없었지만 지금은 남자와 같이 공씨 사회에 기여한 사람이라면 묻힐 수 있는 것 같다.